[이코노미세계]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30년을 훌쩍 넘겼지만 지방의회의 권한과 위상은 여전히 ‘반쪽짜리’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지방정부의 예산과 행정 규모는 갈수록 커지고 주민들의 정책 수요도 복잡해지고 있지만, 지방의회는 조직과 인사, 입법 지원 등 의정활동의 핵심 영역에서 충분한 자율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 최대 광역의회인 경기도의회가 이 같은 제도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전국 단위 연대에 나섰다. 출발점은 지방의회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종합적으로 규정하는 ‘지방의회법’ 제정이다.
남종섭 경기도의회 의장은 지방의회법 제정을 임기 중 최우선 과제로 제시하고 전국 시·도의회와의 공동 대응 체계 구축에 착수했다. 개별 의회 차원의 건의에 머물지 않고 전국 광역의회가 하나의 목소리를 내도록 해 국회와 정부의 제도 개선을 끌어내겠다는 구상이다.
남 의장은 15일 인천광역시의회를 찾아 박종혁 인천광역시의회 의장 등 의장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그리고 인천시의회 의장단의 취임을 축하한 뒤 지방의회법 제정의 필요성과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전국 광역의회가 참여하는 협력체계 구축을 제안했다.
경기도의회가 지방의회법 제정을 고리로 전국 연대에 나선 것은 지방의회의 독립이 특정 지역만의 요구가 아니라 지방자치 제도의 완성을 위한 공통 과제라는 판단에서다. 지방의회의 권한과 책임을 법률로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는 한 주민 중심의 실질적인 지방자치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문제의식도 깔려 있다.
남 의장은 “지방의회는 주민의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민생을 책임지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최전선”이라며 “지방의회법 제정은 지방의회가 주민들에게 더 큰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는 지방정부와 지방의회가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지방자치단체장은 행정을 집행하고, 지방의회는 조례 제정과 예산 심의, 행정사무감사 등을 통해 이를 감시한다.
하지만 실제 운영 과정에서는 지방의회가 지방정부에 비해 조직과 인력, 정보 접근 능력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지역 현안이 복잡해지고 지방정부의 사업 규모가 확대될수록 지방의회의 전문적인 분석과 감시가 중요해지지만, 이를 뒷받침할 제도와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국회는 독립된 법률인 국회법을 근거로 조직과 운영, 입법 절차 등을 규정하고 있다. 반면 지방의회는 지방자치단체의 조직과 운영 전반을 다루는 지방자치법 안에서 지방정부와 함께 규율되고 있다. 지방의회가 독립적인 주민 대표기관임에도 이를 종합적으로 뒷받침하는 별도의 법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지방자치법 전부 개정으로 2022년부터 지방의회 인사권 독립과 정책지원관 제도 등이 시행되면서 지방의회의 자율성이 일부 확대됐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의회 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지방의회 의장이 행사할 수 있게 됐지만, 의회사무기구의 조직과 정원은 여전히 지방자치단체의 조례와 행정기구 체계에 영향을 받는다. 필요한 조직을 의회가 자체적으로 설계하거나 전문 인력을 충분히 배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남 의장이 지방의회법 제정을 취임 초기 핵심 과제로 꺼내 든 것도 이 같은 구조적인 한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다. 단순히 지방의회의 권한을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의정활동에 필요한 조직과 인력, 입법 지원체계를 법률로 보장해 지방의회가 주민 대표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취지다.
남 의장이 인천시의회에 제시한 지방의회법의 핵심 내용은 크게 다섯 가지다. 자치입법권 확대, 의회사무기구 조직권 확보, 광역의회 입법 지원기관 설립, 자체 감사권 부여, 정책지원 전문 인력 확대다.
우선 자치입법권 확대는 지방의회가 지역의 특성과 주민 수요를 조례에 보다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현행 제도에서는 지방의회가 법령의 범위 안에서 조례를 제정할 수 있어 지역별로 필요한 정책을 추진하려 해도 상위법의 제한을 받는 사례가 발생한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도시와 농어촌은 인구 구조와 산업 기반, 교통·복지 수요가 서로 다르다. 모든 지역에 획일적인 기준을 적용하기보다 일정한 범위에서 지방의회의 입법 재량을 넓혀야 한다는 것이 자치입법권 확대 주장의 핵심이다.
의회사무기구 조직권 확보도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지방의회가 행정사무감사와 예산 심사, 조례안 검토에 필요한 전문 조직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어야 지방정부에 대한 실질적인 견제가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현재와 같이 지방의회의 조직과 인력 규모가 지방정부의 조직 운영체계에 크게 영향을 받는 구조에서는 의회가 필요한 분야에 전문 인력을 제때 배치하기 어렵다. 인사권 독립이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려면 이에 상응하는 조직권도 확보돼야 한다는 것이다.
광역의회 입법 지원기관 설립은 지방의원의 정책 및 입법 역량을 전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방안이다. 광역지방정부의 한 해 예산이 수십조원에 이르고 반도체, 인공지능, 기후위기, 광역교통과 같은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정책이 지방행정의 주요 의제로 떠오르면서 의회에도 체계적인 조사·분석 기능이 필요해졌다.
입법 지원기관이 설치되면 조례안의 법률적 타당성과 정책 효과, 예산 소요 등을 보다 전문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지방의원 개인의 역량이나 제한된 보좌 인력에 의존하던 의정활동을 기관 중심의 체계적인 지원 방식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다.
자체 감사권은 지방의회 내부 조직과 사무에 대한 감사를 의회가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다. 의회가 지방정부를 감시하면서 정작 의회 내부 사무에 대해서는 충분한 독립성을 갖지 못하면 견제기관으로서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정책지원 전문 인력 확대도 지방의회의 전문성을 좌우할 핵심 사안이다. 정책지원관은 조례 제·개정과 예산·결산 분석, 행정사무감사 자료 검토 등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지원한다. 그러나 업무 범위에 비해 인력이 충분하지 않아 복잡해지는 지역 현안을 깊이 있게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남 의장의 이번 인천 방문은 지방의회법 제정을 위한 전국 연대의 첫걸음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지방의회법은 국회 입법과 정부의 협조가 필요한 사안인 만큼 한두 의회의 요구만으로는 제정 동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전국 17개 시·도의회가 공동으로 법 제정을 촉구하고 구체적인 제정안을 마련한다면 국회와 정부를 설득할 수 있는 힘도 커질 수 있다. 각 지역의 제도적 어려움과 개선 사례를 모아 법안에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경기도의회는 전국에서 인구와 의원 수, 예산 심의 규모가 가장 큰 광역의회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경기도의회가 지방의회법 제정 논의를 주도하면 다른 광역의회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남 의장은 인천시의회 방문에 이어 같은 날 오후 제주특별자치도를 찾아 송영훈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의장과 간담회를 가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방의회법은 특정 지역이나 특정 의회만의 과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지방자치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과제”라며 “전국 시·도의회가 한목소리로 뜻을 모을 때 지방의회의 독립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제도적 변화를 앞당길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경기도의회도 전국적인 연대의 중심에서 끝까지 역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지방의회법 제정 논의가 국민적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권한 확대와 함께 책임성과 투명성을 강화하는 방안도 제시해야 한다. 조직권과 인사권, 자체 감사권 등이 확대될수록 의회의 예산 집행과 인사 운영을 주민에게 더욱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질 수밖에 없다.
지방의회의 독립이 의원이나 의회 조직의 권한을 늘리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제도 개선의 최종 목적은 지방의회가 주민의 의견을 정책에 제대로 반영하고 지방정부를 더욱 충실하게 견제하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한다.
지방의원과 의회 직원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한 교육체계, 이해충돌 방지 장치, 윤리심사 기능 강화, 의정활동 정보 공개 확대 등도 지방의회법 제정 과정에서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 자체 감사권을 확보할 경우 감사기구의 독립성과 객관성을 어떻게 보장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 요구된다.
전국 시·도의회가 지방의회법 제정에 공동 대응하는 과정에서는 지역과 의회 규모에 따른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수도권 대형 광역의회와 인구가 적은 지역의회는 필요한 조직과 인력 규모가 서로 다를 수 있다. 획일적인 조직 확대보다 지역별 행정 수요와 재정 여건에 맞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회와 정부를 설득할 구체적인 전략도 필요하다. 선언적인 공동 건의를 넘어 법률안의 조문과 재정 소요, 조직 운영방안 등을 담은 제정안을 마련해야 실제 입법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전국 시·도의회의장협의회 등 기존 협의체와의 역할 분담도 중요한 과제가 될 전망이다.
지방의회법 제정은 지방의회 내부의 제도 개선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주민 생활과 직결된 문제다. 지방의회가 전문 인력과 독립적인 입법 지원체계를 갖추면 지방정부의 예산과 정책을 보다 세밀하게 검토할 수 있다.
불필요하거나 중복된 사업을 걸러내고 교통, 복지, 교육, 환경 등 주민 생활과 밀접한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도 가능해진다. 지역 특성에 맞는 조례를 적기에 마련하고 집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신속히 보완하는 기반도 강화될 수 있다.
반대로 지방의회의 전문성과 독립성이 부족하면 지방정부가 제출한 정책과 예산을 형식적으로 심사하는 데 그칠 가능성이 커진다. 이는 행정에 대한 견제 약화뿐 아니라 주민의 세금과 정책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남 의장이 지방의회법 제정을 ‘주민에게 더 큰 책임을 다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라고 규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법 제정의 성과는 의회가 확보한 조직이나 인력의 규모가 아니라 주민의 삶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개선했는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경기도의회가 시작한 전국 연대가 일회성 방문이나 선언에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입법 성과로 이어질지는 앞으로의 협의 과정에 달려 있다. 전국 광역의회가 공동 제정안을 마련하고 국회·정부와의 협의를 끌어낼 수 있느냐가 첫 번째 시험대다.
여기에 확대되는 권한에 걸맞은 책임성과 투명성 강화 방안을 함께 제시해야 국민적 지지도 얻을 수 있다. 지방의회의 독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주민의 목소리가 정책과 예산에 더 정확하게 반영되도록 만드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지방자치의 한 축인 지방정부는 빠르게 성장했지만, 이를 감시하고 견제할 지방의회의 제도적 기반은 상대적으로 더디게 발전해 왔다. 남 의장이 꺼내 든 지방의회법 전국 연대가 지방자치의 기울어진 균형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지 기대된다.
이코노미세계 / 오정희 기자 oknaj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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