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인공지능(AI)이 제조업과 산업 현장의 생산 방식을 빠르게 바꾸는 가운데 경기도 주요 산업단지와 연계한 ‘인공지능고등학교’를 권역별로 설립해야 한다는 제안이 경기도의회에서 나왔다. 학교에서 이론을 가르친 뒤 기업으로 학생을 보내는 기존 직업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산업 현장이 교육과정 설계부터 실습·채용까지 직접 참여하는 새로운 직업교육 체계를 만들자는 구상이다.
첫 모델로는 성남테크노과학고를 AI 특화 고등학교로 전환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이를 성남에 한정하지 않고 반월·시화 국가산업단지와 성남하이테크밸리, 판교테크노밸리, 평택 고덕, 이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화성 등 경기도 핵심 산업 거점으로 확산한다는 것이다.
경기도의회 전석훈 의원은 26일 국중범 경기도의회 교육기획위원장,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성남테크노과학고의 AI 특화고 전환을 시작으로 경기도 전역에 인공지능고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전 의원은 산업 현장에서 이미 AI 전환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직업교육 체계는 산업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AI 전환은 이미 산업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그 현장에 사람을 공급하는 학교만 20년 전 교육과정에 머물러 있다”며 “경기도는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부이자 AI 인프라가 가장 두껍게 깔린 곳인데도 정작 AI 인재를 길러내는 고등학교는 한 곳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서울은 AI 전문 고등학교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반면 경기도의 직업교육은 여전히 모빌리티·반도체 수준에 머물러 있다”며 인공지능고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 의원이 인공지능고 설립 구상에서 특히 강조한 부분은 ‘입지’다. 단순히 기존 특성화고의 학과 명칭을 AI 관련 학과로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AI 전환 수요가 있는 산업단지와 학교를 공간적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공지능고는 도심 한복판이 아니라 산업단지 옆에 세워야 한다”며 “반월·시화 국가산단, 성남하이테크밸리, 판교테크노밸리, 평택 고덕, 이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화성 등 경기도의 주력 산단마다 권역별 거점 인공지능고를 배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학교와 산업단지를 연결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로는 현장 중심 교육이 꼽힌다. AI를 활용한 제조혁신은 단순한 프로그래밍 교육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생산설비의 이상을 감지하거나 제품 불량을 예측하고, 생산공정을 최적화하는 산업 AI는 실제 제조 데이터와 생산라인을 접해야 교육 효과를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전 의원은 “학교 실습실에서 모의 데이터로 배우는 AI와 옆 공장의 불량 데이터로 배우는 AI는 완전히 다른 교육”이라며 “설비 이상 감지, 불량 예측, 공정 최적화 같은 과제는 실제 라인에서만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인공지능고를 단순한 교육시설이 아니라 산업단지의 기술혁신과 인력 양성을 동시에 담당하는 거점으로 육성하겠다는 구상으로 풀이된다.
특히 경기지역에는 반도체와 자동차·전자·기계 등 제조업 기반 산업단지가 곳곳에 형성돼 있어 지역별 산업 특성을 교육과정에 접목할 경우 차별화된 직업교육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는 게 전 의원의 판단이다.
두 번째 이유는 산업단지가 겪고 있는 인력난과 특성화고의 학생 모집난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산업단지 내 중소 제조기업들은 디지털 전환과 AI 도입 필요성을 체감하면서도 이를 담당할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면 일부 특성화고는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학과 개편이나 존폐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산업단지와 특성화고가 각각 인력 부족과 학생 부족이라는 서로 다른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를 ‘산학 연계형 AI 인재 양성’이라는 하나의 정책 틀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 의원은 “산단의 중소 제조기업은 사람이 없어 AI 전환을 못 하고, 특성화고는 학생이 없어 학과를 닫고 있다”며 “두 문제를 따로 풀 이유가 없다. 산단 거점 인공지능고는 지역 산업정책이자 동시에 교육정책”이라고 설명했다.
인공지능고가 제대로 정착할 경우 학생들에게는 졸업 이후 진로와 취업 기회를 제공하고 기업에는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게 핵심이다.
이 같은 모델은 학교의 경쟁력 강화뿐 아니라 지역 산업단지의 인력 확보와 AI 전환을 동시에 지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특성화고 정책과 차이가 있다.
교육과정을 누가,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도 핵심 과제로 제시됐다. 전 의원은 교육기관이 먼저 교육과정을 만든 뒤 기업에 학생을 보내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과정 설계 단계부터 기업이 참여해 실제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과 역량을 교육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교육청이 교육과정을 만들어 놓고 기업에 ‘받아 가라’고 하는 방식은 실패했다”며 “설계 단계부터 지역 기업을 앉혀 놓고, 기업이 실제로 채용하고 싶은 역량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인 교육 프로그램도 제시됐다. 산업단지별 주력 업종에 맞춰 제조 AI와 피지컬 AI, 비전 검사, 산업 데이터 분석 등 특화 트랙을 운영하고 기업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발생하는 과제를 학생들에게 제시해 해결하도록 하는 ‘산업문제 해결형 캡스톤 수업’을 도입하는 방안이다.
여기에 기업 현직 엔지니어가 겸임교사로 교육에 참여하고, 3학년 과정에는 채용연계형 현장실습과 조기 채용 약정을 도입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교육이 졸업과 동시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취업 이후 재직자 계속교육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장기적인 교육 경로를 설계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학생 입장에서는 입학부터 교육, 실습, 취업까지 하나의 진로 체계가 만들어지고 기업 입장에서는 필요한 인재를 교육 단계부터 발굴하고 육성할 수 있는 구조다.
전 의원은 이러한 직업교육의 목표를 “졸업장을 받는 날 채용통지서도 같이 받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취업률 숫자를 관리하는 교육이 아니라, 기업이 먼저 데려가겠다고 줄을 서는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책적 기반도 일정 부분 마련돼 있다. 경기도교육청은 ‘2026 경기직업교육 활성화 기본계획’을 통해 AI+X 기반 미래형 직업교육 모델학교 체제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인공지능·로봇 기반 학과 개편과 인공지능 분야를 포함한 하이테크 특성화고 확대 역시 계획에 담겨 있다.
따라서 전 의원이 제안한 인공지능고 구상이 기존 경기교육 정책과 완전히 별개의 정책이라기보다 현재 추진 중인 직업교육 체제 개편을 산업단지와 보다 직접적으로 연계하는 방식으로 구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남지역의 AI 산업 기반도 인공지능고 전환 구상에 힘을 싣고 있다. 성남에는 경기도 피지컬 AI LAB이 조성돼 있으며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이 주관하는 인공지능 기술개발센터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해당 사업은 오는 2029년까지 국비 100억원을 포함해 총 151억4000만원 규모로 추진될 예정이다. 연구·산업 인프라와 교육기관을 연계할 경우 AI 인재 양성에서 취업, 기업의 기술혁신까지 연결하는 지역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이 전 의원 측 구상이다.
전 의원은 앞서 지난 2월 9일 제388회 임시회 미래과학협력위원회 업무보고에서도 AI 고등학교 전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이 중심이 돼 경기도교육청과 연계한 ‘AI 고등학교 전환 프로그램’을 직접 설계하고 이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할 것을 주문했다.
이번 간담회에서는 한발 더 나아가 성남테크노과학고를 실제 전환 모델로 삼고 이를 경기도 주요 산업단지로 확대하는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전 의원은 “경기도에는 연구기관도, 인프라도, 기업도 다 있다. 없는 것은 이것들을 하나로 꿰는 학교뿐”이라며 “성남테크노과학고 전환을 첫 사례로 만들고, 이를 권역별 산단 거점 모델로 확산시키겠다”고 밝혔다.
향후 관건은 인공지능고 설립 또는 기존 특성화고 전환에 필요한 구체적인 로드맵과 재원 마련이다. 학교 교육과정 개편뿐 아니라 전문 교원 확보, 기업 참여 방식, 실습시설 구축, 산업단지 입주기업과의 협력체계, 현장실습과 채용 연계 모델 등을 구체화해야 실제 정책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권역별 산업 구조가 서로 다른 만큼 획일적인 AI 교육과정을 적용하기보다 지역 산업 특성에 맞는 교육 모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
반월·시화 국가산단과 화성 등 제조업 밀집지역에서는 제조 AI를, 판교·성남에서는 소프트웨어와 피지컬 AI를, 용인·평택·이천 등 반도체 산업벨트에서는 반도체 공정과 AI를 결합하는 식의 지역별 특화 전략이 필요하다는 취지다.
인공지능고 구상이 현실화될 경우 기존 특성화고의 역할도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산업 수요에 맞춰 학과를 개편하는 수준에서 한발 더 나아가 학교가 지역 산업 생태계의 인재 공급 거점으로 기능하는 방식이다.
전 의원은 앞으로 도정질문과 상임위원회 활동, 예산심의를 통해 인공지능고 설립 로드맵과 소요 예산 등을 점검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경기도교육청과 성남시, 산업단지 입주기업 등과 실무 협의를 이어가겠다는 계획이다.
AI와 반도체 등 첨단산업 투자가 집중된 경기도에서 산업 현장과 직업계고를 직접 연결하는 ‘산단 거점 인공지능고’가 새로운 직업교육 모델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코노미세계 / 오정희 기자 oknaj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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