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한 해의 끝자락에서 정치인의 언어는 종종 숫자와 성과로 채워진다. 예산 집행률, 사업 추진 실적, 공약 이행률 같은 지표들이 연말 인사말의 중심을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2025년의 마지막을 앞둔 어느 날, 최대호 안양시장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민들 앞에 섰다. 성과보다 ‘위로’를, 계획보다 ‘숨 고르기’를 먼저 꺼냈다.
최 시장은 30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시민들에게 연말 인사를 전하며, 한 편의 시를 인용했다. 박금숙 시인의 '송년의 노래' 중 ‘지칠 만큼 질주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라는 구절이다. 이 시구가 “문득 가슴에 스며들었다”고 표현하며,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의 마음을 담담히 풀어냈다.
2025년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은 해였다. 경기 침체의 장기화, 불안정한 고용 환경, 사회 곳곳에 쌓여온 피로감은 시민 개개인의 삶에 적지 않은 무게로 작용했다. 지방정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복지 수요는 늘어났고, 재정 운용의 부담은 커졌으며, 도시의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과제는 더 복잡해졌다.
그럼에도 이날 메시지에서 최 시장은 정책이나 시정 성과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대신 “기쁨도 있었고, 아픔도 있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견뎌냈다”는 표현으로 시민들의 한 해를 먼저 돌아봤다. 행정의 주체로서가 아니라, 같은 시간을 지나온 동행자로서의 시선에 가깝다.
정치인의 연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노력하겠다’, ‘더 잘하겠다’는 다짐 대신, 그는 “이제 각자의 길에서 흘렸던 땀과 감당했던 무게와 작별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연말을 ‘다짐의 시간’이 아니라 ‘놓아주는 시간’으로 정의한 셈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최 시장이 스스로의 미련과 아쉬움을 솔직하게 언급한 부분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순간들, 미처 다 채우지 못한 마음들이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고 털어놨다. 정치인의 메시지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고백이다.
이 대목은 책임 회피나 자기 연민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태도에 가깝다. 이어 최 시장은 다시 시인의 문장을 인용하며 “지칠 만큼 질주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끝없이 더 나은 결과를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충분했다’는 말은 오히려 낯설게 다가온다.
정치와 행정 역시 끊임없는 경쟁과 평가의 영역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멈춰 서는 용기’가 때로는 전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최 시장은 “지금 이 숨 고르기의 시간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개인의 삶뿐 아니라 도시 운영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연말 인사는 단순한 의례를 넘어 그 도시의 분위기와 행정 철학을 드러내는 하나의 장면이다. 안양시는 그동안 문화·복지·도시재생 등 다양한 분야에서 변화를 시도해 왔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그 변화를 어떻게 체감하느냐는 문제다.
이번 메시지는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보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먼저 돌아보자는 제안에 가깝다. 또, “해가 저문다고 서두르지 않아도 좋고, 아쉬워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성과 중심의 사회에서 흔히 놓치기 쉬운 문장이다.
이는 행정이 시민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속도를 늦추고, 과정에 귀 기울이며, 때로는 멈춰 서서 돌아보는 행정. 최 시장의 연말 인사는 그러한 방향성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메시지의 마지막은 분명하다. “여러분의 수고에 깊은 위로를 전한다.” 정치인이 시민에게 ‘감사’가 아닌 ‘위로’를 전하는 장면은 흔치 않다. 이는 시민을 성과의 수혜자가 아니라, 도시를 함께 견뎌온 동반자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나온 말이다.
이어 “다가올 새해에도 우리 함께 한 걸음씩 걸어가기를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도약’이나 ‘비상’ 같은 거창한 표현 대신, ‘한 걸음씩’이라는 표현을 선택한 점도 인상적이다. 이는 불확실한 시대를 건너는 현실적인 태도이자, 시민과 보폭을 맞추겠다는 약속으로 읽힌다.
또한 정치는 종종 갈등과 경쟁의 언어로 기억된다. 그러나 때로는 위로와 성찰의 언어가 공동체를 더 단단하게 만든다. 최 시장의 이번 연말 메시지는 거창한 선언이나 정책 발표는 없지만, 그 대신 시민의 삶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간다.
2025년의 끝에서 안양시장이 건넨 이 짧은 글은 묻는다. 우리는 충분히 애썼는가, 그리고 이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가. 그 질문은 특정 도시를 넘어, 이 시간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공통으로 닿는다.
해는 저물고, 한 해는 끝나간다. 그러나 ‘지칠 만큼 질주했다면 충분하다’는 이 문장은, 어쩌면 새해를 맞이하는 가장 조용하고도 단단한 출발선일지 모른다.
이코노미세계 / 김병민 기자 bmk88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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