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10년 전,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신발 깔창이나 휴지로 버텨야 했던 청소년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우리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생리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상이지만, 생리용품을 구입할 형편이 되지 않는 여성청소년에게는 학교생활과 외출마저 가로막는 현실적인 장벽이었다.
당시 ‘깔창 생리대’라는 말로 알려진 이 사건은 생리용품을 개인이 알아서 마련해야 하는 생활용품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건강과 인간다운 삶을 위해 사회가 보장해야 할 필수품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촉발했다. 이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생리용품 지원사업을 확대했지만, 지원 대상과 신청 절차, 이용 과정에서의 심리적 부담 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수원특례시가 이러한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 누구나 공공시설에서 생리용품을 이용할 수 있는 공공생리대 서비스 ‘모두의 생리대’를 시작했다. 별도의 자격 확인이나 신청 절차 없이 필요한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 문턱을 낮춘 것이 핵심이다.
이재준 수원특례시장은 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0년 전 생리대를 살 수 없어 신발 깔창으로 버티고, 학교에도 가지 못했던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졌다”며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마음 아파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 아픔에서 시작된 변화가 이제 우리 일상의 더 가까운 곳까지 이어진다”며 ‘모두의 생리대’ 사업의 취지를 설명했다.
수원시는 우선 시청과 장안·권선·팔달·영통 등 4개 구청, 영통구보건소, 수원시가족여성회관을 비롯한 공공시설 10곳에 생리대 지급기를 설치했다. 지급기가 설치된 장소에서는 필요한 시민이 생리용품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이번 사업은 생리용품 지원을 특정 계층에 대한 선별적 복지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시민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보편적 공공서비스로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갑작스럽게 생리가 시작됐거나 생리용품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시민도 가까운 공공시설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수원시는 공공생리대 지급기를 오는 9월까지 총 60대로 확대할 계획이다. 수원수목원과 미술관, 박물관 등 시민 방문이 많은 문화·여가시설에도 지급기를 추가로 설치해 이용 접근성을 높일 방침이다.
생리용품이 필요한 상황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학교나 직장뿐 아니라 문화시설과 체육시설, 관광지 등을 이용하는 과정에서도 긴급한 수요가 발생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지급기를 다양한 공공시설로 확대하는 것은 시민의 이동 동선 안에 실질적인 생활 안전망을 구축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공공생리대 사업이 안정적으로 정착하려면 단순히 지급기 수를 늘리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설치 장소를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안내 체계를 마련하고, 생리용품이 떨어지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수량을 점검해야 한다. 지급기의 청결 상태와 접근성, 이용자 편의성도 지속해서 관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용자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생리용품을 받을 수 있도록 지급기의 설치 위치를 세심하게 정해야 한다. 공공시설 내에서도 지나치게 노출된 장소에 설치하면 이용자가 불편을 느낄 수 있고, 반대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두면 정작 필요한 시민이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공공생리대 서비스의 가장 큰 변화는 생리용품을 일부 취약계층만을 위한 복지 물품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필요한 생활 필수품으로 바라본다는 데 있다.
그동안 여성청소년 생리용품 지원은 경제적 형편이나 연령 등의 기준을 충족한 대상자가 직접 신청하는 방식으로 주로 운영됐다. 취약계층을 집중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원 대상임을 입증해야 하는 과정에서 낙인감을 느끼거나 신청 방법을 알지 못해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었다.
반면 공공시설에 생리대를 비치하는 방식은 이용자의 소득과 나이, 거주지 등을 확인하지 않는다. 화장실에 휴지와 비누를 비치하듯 생리용품도 시민의 건강과 위생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기본 물품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이른바 ‘월경 빈곤’ 문제에 대한 지방정부의 대응 범위를 넓혔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월경 빈곤은 단순히 생리대를 구입할 돈이 부족한 상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필요한 생리용품을 충분히 사용하지 못하거나, 관련 정보와 위생시설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포함한다.
생리용품을 제때 교체하지 못하면 피부 질환이나 감염 위험이 커질 수 있다. 생리대를 마련하지 못해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외부 활동을 포기한다면 학습권과 사회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생리용품 지원이 경제적 부담 경감을 넘어 건강권과 교육권, 이동권을 보장하는 정책으로 다뤄져야 하는 이유다.
특히 청소년은 가정의 경제적 형편에 직접 대응하기 어렵다. 보호자에게 생리용품 구입비를 요구하기 힘든 환경에 놓여 있거나 가족의 돌봄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 생리 기간마다 반복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공공시설에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지원 체계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최소한의 보호 장치가 될 수 있다.
수원시는 공공생리대 서비스와 함께 ‘여성청소년 생리용품 보편지원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공공시설에서 긴급하게 필요한 생리용품을 제공하는 것과 별도로, 여성청소년이 일상적으로 사용할 생리용품을 안정적으로 마련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식이다.
지원사업은 수원시가 시민의 생활비 부담을 덜기 위해 추진하는 ‘새빛생활비패키지’의 하나로 진행된다. 상반기에 신청하지 못한 11~18세 여성청소년은 주소지 관할 행정복지센터를 방문해 신청할 수 있다.
두 사업은 지원 방식과 역할에서 차이가 있다. ‘모두의 생리대’가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시민에게 긴급하고 보편적인 접근성을 제공한다면, 여성청소년 생리용품 보편지원 사업은 일정 연령대 청소년에게 지속적인 구매 기반을 제공하는 정책이다.
공공시설 현장 지원과 연령별 보편지원을 함께 운영하면 생리용품 정책의 빈틈을 줄일 수 있다. 평소에는 여성청소년 지원사업을 통해 생리용품을 구매하고, 갑작스럽게 생리가 시작되거나 준비한 용품이 부족한 경우에는 공공시설 지급기를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원제도가 마련돼 있어도 대상자가 알지 못하면 실질적인 혜택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학교와 청소년시설, 행정복지센터 등을 통한 적극적인 안내가 필요한 이유다. 보호자의 관심이나 정보력이 부족한 청소년도 지원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학교와 지역사회가 촘촘한 전달체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모두의 생리대’가 일회성 정책을 넘어 시민에게 신뢰받는 공공서비스로 자리 잡으려면 운영 과정에 대한 지속적인 점검이 뒤따라야 한다.
우선 시설별 이용량을 분석해 수요가 많은 장소에는 충분한 물량을 배치해야 한다. 이용이 집중되는 시간과 시설 특성도 살펴야 한다. 청소년 이용자가 많은 도서관이나 문화시설,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은 수목원과 박물관 등은 이용 수요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급기가 비어 있거나 고장 난 상태로 장기간 방치되면 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 있다. 담당 부서와 시설 관리 주체의 역할을 명확히 하고, 고장이나 물량 부족을 시민이 간편하게 알릴 수 있는 신고 체계를 마련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생리용품의 품질 역시 중요하다. 피부에 직접 닿는 위생용품인 만큼 안전성과 품질이 검증된 제품을 공급해야 한다. 시민의 이용 경험과 요구를 반영해 제품 종류와 지급 방식 등을 개선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일각에서 제기할 수 있는 과다 이용이나 물품 관리 문제에는 이용을 제한하는 방식보다 적정한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복잡한 인증 절차나 이용 제한을 도입하면 사업의 핵심인 접근성과 보편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생리대 서비스의 목적은 모든 시민에게 생리용품을 무제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생리용품이 없어 곤란을 겪거나 일상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하는 데 있다.
수원시의 이번 사업은 시민 생활에서 발생하는 작은 불편과 어려움을 지방정부가 얼마나 세밀하게 발견하고 대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대규모 개발사업이나 기반시설 확충이 도시의 외형을 바꾸는 정책이라면 공공생리대 서비스는 시민의 평범한 하루를 지키는 생활밀착형 정책이다. 예산 규모나 시설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작을 수 있지만, 당장 생리용품이 필요한 시민에게는 체감도가 매우 높은 서비스다.
10년 전 신발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해야 했던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생리용품을 구하지 못하는 문제가 개인의 어려움으로만 치부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그 문제의식은 취약계층 지원에서 여성청소년 보편지원으로, 다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생리대 서비스로 확장되고 있다.
이재준 시장은 “삶의 빈틈을 먼저 발견하고 채워가는 것, 그것이 시민의 삶을 지키는 행정이라고 생각한다”며 “늘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반값생활비 도시 수원’을 만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수원시가 추진하는 ‘모두의 생리대’는 생리용품 지급기 60대를 설치하는 데만 의미가 있는 사업은 아니다. 생리를 숨겨야 할 문제가 아닌 일상의 건강 문제로 바라보고, 생리용품을 누구나 필요할 때 이용할 수 있는 필수품으로 인정한다는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업의 진정한 성과는 설치된 지급기의 숫자보다 시민이 실제로 얼마나 편리하고 부담 없이 이용하느냐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공공시설 10곳에서 시작한 작은 변화가 학교와 청소년시설, 문화·체육시설 등 지역사회 전반으로 확산해 시민의 일상을 지키는 촘촘한 안전망으로 자리 잡을지 기대된다.
이코노미세계 / 김장수 기자 bmk88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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