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매향리선 아픈 역사 넘어 평화의 의미 되새겨
부천·의정부 도심 가까이서 만나는 특별한 ‘쉼표’
[이코노미세계] 여행의 목적이 언제나 더 많이 보고, 더 멀리 가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천천히 걷고 한곳에 오래 머무르며 복잡한 생각을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하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고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9월. 경기도 곳곳에는 굳이 먼 곳까지 떠나지 않아도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들이 있다. 수원화성 성곽 아래 고즈넉한 한옥부터 550여 년의 시간을 간직한 광릉숲, 하늘을 향해 뻗은 가평 잣나무숲, 전쟁과 폭격의 상처를 평화로 바꿔낸 화성 매향리까지 그 모습도 다양하다.
도심 가까이에서 자연을 만나는 방법도 있다. 부천에서는 낮에는 수목원을 걷고 밤에는 빛과 미디어아트가 어우러진 숲을 만날 수 있다. 의정부에서는 도심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도 울창한 나무 사이를 걸으며 잠시 일상과 거리를 둘 수 있다.
‘무엇을 더 채울 것인가’보다 ‘무엇을 잠시 내려놓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여행이다. 몸과 마음에 쉼표가 필요한 계절, 경기도에서 만날 수 있는 ‘비움의 여행지’ 6곳을 따라가 봤다.
- 수원화성 성곽 아래 고즈넉한 한옥... 남수헌에서 보내는 느린 하루
수원화성 성곽 안쪽 남수동 골목길을 걷다 보면 검은 기와와 단정한 담장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에 자리 잡은 ‘남수헌(南水軒)’은 2026년 8월 정식 운영을 시작한 한옥 체험형 복합문화공간이다.
전통 한옥의 단아한 미학에 현대적인 편의를 접목한 것이 특징이다. 수원화성 성곽길과 가까워 한옥의 정취를 느끼면서 동시에 수원화성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골목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사랑채, 별당채가 정갈하게 이어진다. 규모가 큰 숙박시설이라기보다는 작은 한옥마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중정을 품은 마당과 한 그루의 나무, 처마 아래로 들어오는 햇살은 빠르게 움직이던 일상의 시간을 잠시 느리게 만든다.
남수헌에는 모두 12개의 한옥 객실이 마련돼 있다. 객실 유형에 따라 다실과 마당을 이용할 수 있으며 일부 객실에서는 프라이빗 온탕도 즐길 수 있다.
숙박객만을 위한 공간도 아니다. 1층에는 갤러리카페 ‘오스수원’과 한옥 라이브러리가 마련돼 일반 방문객도 이용할 수 있다. 전시를 둘러보고 차를 마시거나 책을 펼쳐 들 수 있어 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가는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수원화성을 ‘관람하는 여행’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곽 아래에서 머물고 쉬면서 도시의 시간을 경험하는 여행이 가능해진 셈이다.
- 550여 년을 지켜온 광릉숲... 포천 국립수목원에서 만나는 ‘숲의 시간’
사람의 시간이 아닌 숲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포천 국립수목원이 있다.
광릉숲 중심부에 자리한 국립수목원은 550여 년 동안 자연 그대로 보전돼 온 생태계의 보고다. 1468년 조선 세조의 능림으로 지정된 이후 오랜 기간 보호받아 온 온대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천연림이다. 그 생태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0년에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오랜 시간 보호받아 온 숲이라는 점에서 이곳의 여행법은 화려한 볼거리를 찾아 빠르게 이동하는 관광과는 다르다. 천천히 걸으며 나무와 햇살, 바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여행이 된다.
수목원에는 산림박물관과 산림생물표본관, 열대식물자원연구센터 등 전문 연구·전시 시설이 갖춰져 있으며 다양한 생태 탐방로도 조성돼 있다.
특히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나무가 이어지는 ‘전나무 숲길’과 고요한 물결을 바라볼 수 있는 ‘육림호’ 산책로는 국립수목원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은 곳이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숲의 향기가 퍼지는 길을 걷다 보면 일상에서 쌓인 복잡한 생각도 조금씩 멀어진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목적에서 벗어나 그저 숲속을 걷는 시간이 여행의 중심이 된다.
- 80년 넘은 잣나무 사이로... 가평 잣향기푸른숲에서 ‘깊은 호흡’
포천에서 숲의 오랜 시간을 만났다면 가평에서는 잣나무 사이에서 자연과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축령산과 서리산 자락 해발 450~600m에 자리한 ‘가평 잣향기푸른숲’은 울창한 잣나무 숲길을 걸으며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산림치유 공간이다.
이곳에는 수령 80년 이상의 잣나무림이 국내 최대 규모로 분포해 있다. 숲에 들어서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잣나무가 시야를 채운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숲의 향기가 퍼지면서 도심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진다.
숲길은 누구나 비교적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완만한 경사의 무장애 나눔길을 비롯해 다양한 산책로가 조성돼 있으며 곳곳에는 평상과 벤치 등 쉼터가 마련돼 있다.
빠르게 목적지까지 걸어가기보다는 중간중간 멈춰 앉아 바람과 새소리를 듣는 것이 이곳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숲체험과 산림치유 프로그램, 목공체험 등 다양한 산림복지 프로그램도 운영된다. 단순히 숲을 바라보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연과 직접 교감하며 일상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폭격장의 상처에서 평화의 공간으로... 화성 매향리가 건네는 질문
‘비움’이 반드시 자연 속 휴식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역사를 돌아보며 마음속에 남아 있는 무거운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여행의 한 방식이다.
화성 매향리평화기념관은 그런 여행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매향리는 반세기가 넘는 기간 미군 폭격훈련장이 있었던 곳이다. 1950년대 쿠니사격장이 들어선 이후 주민들은 오랜 시간 폭격의 굉음과 불발탄 위험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주민들의 노력 끝에 사격장은 2005년 폐쇄됐다.
현재 매향리평화기념관은 그 역사를 기록하고 평화의 가치를 전하는 역사·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설계한 기념관은 붉은 벽돌과 자연광이 어우러진 차분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에서는 쿠니사격장의 역사와 당시 주민들의 삶, 평화를 되찾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옛 쿠니사격장 존치건축물에도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관람을 마친 뒤에는 인접한 매향리평화생태공원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다. 폭격과 소음의 공간이었던 곳이 평화를 기억하고 자연을 만나는 공간으로 변화했다는 점에서 매향리 여행은 다른 여행지와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무언가를 즐기고 소비하는 여행이라기보다 과거의 상처를 바라보며 오늘의 평화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에 가깝다.
- 낮에는 초록 숲, 밤에는 빛의 숲... 부천에서 즐기는 두 얼굴의 자연
멀리 교외로 나가지 않고도 자연을 만나고 싶다면 부천 자연생태공원이 있다. 지하철 7호선 까치울역 인근에 자리해 접근성이 좋은 이곳에서는 수목원과 식물원, 자연생태박물관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공원 안 부천무릉도원수목원에는 1000종의 식물이 식재돼 있으며 암석원과 약용식물원, 명상원, 하늘호수 등 다양한 테마 공간이 이어진다.
약 2㎞ 길이의 무장애 데크길인 ‘누구나숲길’도 조성돼 있어 숲길 이용 부담을 낮췄다. 유리 온실로 만들어진 부천식물원에서는 날씨와 계절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식물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이곳은 해가 지면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야간 관광 콘텐츠인 ‘부천 루미나래 도화몽’이 약 1.5㎞의 수목원 산책로와 데크 숲길을 따라 12개 콘텐츠로 펼쳐진다. 조명과 영상이 자연경관에 더해지면서 낮의 수목원과는 다른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낮에는 초록빛 숲을 천천히 걸으며 자연을 즐기고, 밤에는 빛과 미디어아트가 만들어내는 또 다른 숲을 경험할 수 있는 셈이다.
- 집에서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의정부 직동근린공원의 ‘초록 쉼표’
여행을 위해 반드시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공간과 가까운 곳에서도 잠시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의정부 도심에 자리한 직동근린공원이 대표적이다. 도시와 바로 맞닿아 있지만 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울창한 수목과 산책로가 이어진다. 도심 생활권 안에서 숲길을 걸으며 여유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공원은 칸타빌라정원과 청파원, 힐빙정원, 피크닉정원 등 4개 테마 공간으로 구성돼 계절마다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축구장을 비롯한 다목적 체육시설과 어린이 야외체험장, 야외공연장 등도 갖췄다. 곳곳에 정자와 숲속 쉼터가 마련돼 있어 산책하다 잠시 머무르기에도 좋다.
산책로를 따라 더 걸으면 북한산국립공원 사패산 일대의 안골계곡까지 이어진다. 울창한 나무 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면 도심과 멀리 떨어지지 않고도 호젓한 숲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직동근린공원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가장 일상적인 여행의 모습이다. 거창한 계획을 세우거나 먼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집과 가까운 공원에서 걷고 쉬는 것만으로도 일상에 작은 여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수원 남수헌과 포천 국립수목원, 가평 잣향기푸른숲, 화성 매향리평화기념관, 부천 자연생태공원, 의정부 직동근린공원은 서로 성격이 다른 공간이다.
한곳에서는 한옥 처마 아래 머물고, 다른 곳에서는 수백 년을 이어온 숲을 걷는다. 잣나무 사이에서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과거 폭격장의 아픈 역사를 마주하며 평화의 의미를 생각하기도 한다. 낮과 밤이 다른 숲을 경험하거나 집에서 가까운 공원을 천천히 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공간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빠르게 이동하면서 많은 장소를 확인하는 여행이 아니라 한곳에 머물고, 걷고, 바라보며 일상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점이다.
여행에서 무엇인가를 더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내려놓으면 오히려 보이지 않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처마 아래 들어오는 햇살과 숲 사이를 지나는 바람, 고요한 물결과 오래된 역사의 흔적처럼 평소 지나쳤던 것들이 여행의 중심으로 다가온다.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9월은 그런 여행을 시작하기 좋은 계절이다. 몸과 마음에 잠시 쉼표가 필요하다면 목적지를 얼마나 멀리 정할 것인가보다 어떤 속도로 여행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볼 만하다. 복잡한 일상을 잠시 비워내고 걷고, 머물고, 생각하는 시간. 경기도의 여섯 공간이 보여주는 가을 여행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코노미세계 / 김장수 기자 bmk88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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