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역사는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고, 진실은 지우려 할수록 더욱 선명해진다.” 정명근 화성특례시장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역사적 진실을 후대에 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피해 생존자가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에서 지방정부와 시민사회가 피해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일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메시지다.
정 시장은 14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사실을 알리며 “할머님들의 증언과 용기로 기록해 온 역사를 잊지 않고 지켜나가겠다”고 밝혔다.
8월 14일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피해자들의 존엄과 명예를 회복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지정된 국가기념일이다. 이날은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침묵을 강요받았던 피해자가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의 피해를 처음으로 공개한 날이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김 할머니의 증언은 개인의 고백에 머물지 않았다. 오랜 세월 감춰졌던 피해의 실상을 드러내고, 국내외 피해자들이 잇따라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전쟁 피해 여성의 인권과 명예 회복, 역사적 책임을 둘러싼 국제적 의제로 확산하는 출발점도 됐다.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정 시장이 공개한 글에 따르면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가운데 생존자는 이제 5명뿐이다. 피해 당사자의 육성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생존자 수의 감소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과거에 머문 역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하느냐에 따라 미래 세대의 인식이 달라질 수 있는 현재의 과제라는 점을 일깨운다. 피해자들이 직접 말할 수 없는 시대가 다가올수록 증언과 자료를 보존하고, 이를 교육과 문화의 언어로 전달하는 사회적 책임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정 시장은 “우리는 할머님들의 증언과 용기로 기록해 온 역사를 잊지 않고 지켜나가며, 다시는 같은 아픔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후대에 온전히 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언급한 ‘기억’과 ‘기록’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선다. 피해자의 존재와 증언을 역사 속에 분명히 남기는 한편, 전쟁과 폭력이 여성의 존엄과 인권을 어떻게 짓밟았는지를 미래 세대가 배우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성특례시는 이러한 기억의 책임을 지역 차원에서 실천해 왔다. 출발점은 2014년 동탄 센트럴파크에 건립된 평화의 소녀상이다.
평화의 소녀상은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상징한다. 동시에 피해자의 존엄 회복과 전쟁 없는 세상을 향한 시민들의 염원을 담고 있다.
동탄 센트럴파크에 세워진 소녀상은 시민들이 일상 속에서 역사를 마주하는 공간이 됐다. 역사적 기억을 박물관이나 기념관 안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시민들이 산책하고 쉬는 생활공간으로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교과서 속 사건을 현실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하는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화성시의 기억 활동은 지역의 경계를 넘어 해외로도 이어졌다. 화성시는 캐나다와 중국, 호주 등 세계 여러 지역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의 역사를 알리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전하는 데 힘써 왔다.
해외에 세워진 소녀상은 한국인만을 위한 추모 조형물이 아니다. 국적과 언어가 다른 세계 시민들에게 전쟁 중 발생한 여성 인권 침해의 실상을 알리고, 같은 비극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보편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역사적 사실을 축소하거나 피해자의 증언을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해외 소녀상은 기록과 증언을 지키는 공공의 기억 공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뜻을 모아 건립에 참여하고 현지 사회와 연대한다는 점에서도 상징적이다.
지방정부의 역할도 주목된다. 외교와 과거사 문제는 중앙정부의 영역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역사를 기억하고 시민에게 전달하는 일은 지역사회와 지방정부가 함께 담당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지역에 세워진 기념물과 매년 이어지는 추모행사,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역사·인권 교육은 거대한 담론을 시민의 삶 속으로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 지방정부가 시민사회와 함께 기억의 공간을 조성하고 관련 행사를 지원하면 역사적 사실은 다음 세대의 생활 속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화성시가 국내외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나선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해석된다. 피해자의 고통을 특정 시기와 지역에 갇힌 사건으로 보지 않고, 인류가 함께 기억해야 할 전쟁·여성·인권의 문제로 확장한 것이다.
기억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기념일 행사와 상징물 건립에 더해 체계적인 기록과 교육도 필요하다. 피해 생존자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증언이 왜곡되거나 사라지지 않도록 영상과 문서, 사진 등 관련 자료를 보존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역사적 배경뿐 아니라 피해자들이 겪은 삶과 인권 침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교육 내용을 발전시키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정 시장이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해야 할 책임은 더욱 커진다”고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간이 흐르면 상처가 자연스럽게 치유되거나 역사적 책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억을 이어갈 주체가 피해 당사자에서 시민과 미래 세대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피해자를 단순히 수동적인 희생자로만 기억하지 않는 일이다. 피해자들은 오랜 침묵을 깨고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으며, 이를 통해 전시 성폭력과 여성 인권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꺼내 놓는 용기로 역사를 움직인 인권운동의 주체였던 셈이다.
피해자들의 증언은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전쟁과 여성·아동 대상 폭력을 돌아보게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일이 현재와 미래의 인권을 지키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화성특례시는 인구 100만명을 넘어선 대도시로 성장했다. 급격한 도시 발전과 함께 공동체가 공유해야 할 역사적 가치와 시민의식을 세우는 일도 중요해졌다. 정 시장이 108만 시민과 함께 기억하고 기록하겠다고 밝힌 것은 도시의 외형적 성장 못지않게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시민 공동체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다만 기억의 지속성을 확보하려면 단발성 기념행사를 넘어 장기적인 정책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과제도 남는다. 국내외 소녀상의 건립 취지와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시민과 학생들이 관련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해외 소녀상이 현지 사회에서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교육과 교류의 거점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연대도 요구된다.
피해 생존자가 줄어들수록 역사 왜곡에 대응할 기록의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피해자의 증언을 다음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매체로 남기고, 지역의 역사·문화 교육과 연계하는 노력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평화의 소녀상 앞에 놓인 빈 의자는 세상을 떠난 피해자들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오늘을 사는 시민들을 위한 자리다. 그 의자에 앉아 소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순간, 시민은 역사의 관찰자가 아니라 기억을 이어갈 당사자가 된다.
2014년 동탄 센트럴파크에서 시작된 화성의 평화의 소녀상은 캐나다와 중국, 호주 등으로 건너가 국경을 초월한 기억의 연결고리가 됐다. 한 도시의 시민들이 시작한 기억 운동이 세계 시민에게 전쟁과 여성 인권, 평화의 가치를 묻는 공공의 메시지로 확장된 것이다.
정 시장은 “할머님들의 목소리가 역사 속에 온전히 남을 수 있도록 108만 화성특례시민과 함께 기억하고 기록하며 그 뜻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기억은 저절로 이어지지 않는다. 누군가 기록하고 가르치며, 다음 세대가 다시 그 의미를 되새길 때 비로소 역사가 된다. 피해자 다섯 명이 우리 곁에 남은 지금, 화성이 국내외에 세운 평화의 소녀상은 시민들에게 묻고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누가 기억하고, 그 기억을 어떤 미래로 이어갈 것인가.
이코노미세계 / 이주은 기자 pin827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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