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사람은 누구나 인생을 살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쓴다. 어떤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광복 80주년을 앞둔 시점,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이 말은 한 점의 글씨에서 시작된다. 100여 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안중근 의사의 유묵(遺墨) ‘장탄일성 선조일본(長歎一聲 先弔日本)’. ‘큰 소리로 길게 탄식하며 일본의 멸망을 먼저 조문한다’는 뜻의 이 글은, 단순한 서예 작품이 아닌 독립운동사의 결정적 증언이다
안중근 의사가 이 글을 남긴 시점은 1910년, 여순감옥에 수감돼 사형을 앞두고 있던 때로 추정된다. 만 30년 6개월. 짧다면 짧은 생이었지만, 그가 남긴 문장은 한 세기를 훌쩍 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유묵은 붓끝이 거칠고 획이 거듭 꺾여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초사체(超死體)’라고 부른다. 죽음을 초월한 상태에서 써 내려간 글씨라는 의미다. 단정하거나 미려하지 않다. 대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꺾이지 않았던 신념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 획, 한 글자마다 ‘살아서 남긴 말’이 아닌 ‘죽음을 각오한 선언’에 가깝다.
이 유묵은 그간 해외에 머물러 있다가, 경기도와 광복회 경기도지부의 협력으로 고국에 돌아왔다. 현재 경기도박물관 에서 열리고 있는 ‘안중근 의사 특별전’을 통해 내년 4월 5일까지 일반에 공개된다. 실물 공개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물관 전시실 한가운데 놓인 유묵 앞에서는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설명 문구보다 먼저 시선을 붙드는 것은 글씨 자체가 가진 압도적인 밀도다. ‘일본의 멸망’을 먼저 조문한다는 문장은 시대를 거슬러 오늘의 한일 관계, 동아시아 질서까지 환기시킨다.
김동연 지사는 이번 유묵 공개를 두고 “독립지사들의 삶과 이야기를 찾고 기리는 일은 단순한 추모가 아니라,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기록과 교과서 속 문장이 아닌, 실제 유물과 현장을 통해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뜻이다.
경기도는 그동안 독립운동 관련 사료 발굴과 전시,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확대해 왔다. 이번 안중근 의사 유묵 귀환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행정 차원의 지원을 넘어, 지방정부가 역사 기억의 주체로 나서는 사례라는 평가도 나온다.
광복 80주년은 단순한 기념의 숫자가 아니다. 독립운동의 기억을 어떻게 현재와 연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시점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그 질문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한다. 기억은 말로만 이어지지 않으며, 실물과 이야기, 그리고 이를 지켜내려는 제도적 노력이 함께할 때 비로소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유묵 한 점이 주는 울림은 수십 장의 해설보다 강하다”며 “특히 젊은 세대에게 독립운동을 추상적 개념이 아닌 ‘실제 인물의 선택’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한다.
안중근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홀로 글을 썼지만, 그 글은 오늘날 공동의 역사로 남았다. 김동연 지사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이야기를 쓴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는 개인의 생을 넘어 사회의 방향을 바꾼다.
경기도박물관 전시장에 걸린 한 폭의 글씨는 묻고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쓰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이야기는 100년 뒤에도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코노미세계 / 김병민 기자 bmk88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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