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직사회, 감정노동 보호 제도화 시급
 
[이코노미세계] “인감증 위임장은 본인이 쓰셔야 합니다.” 민원인에게 정중히 설명한 젊은 공무원은 다음 순간, 찢어진 종이와 볼펜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유는 단 하나. 규정을 지켰다는 것이었다.
공직사회가 무너지고 있다. 아니, 무너지는 건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주민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하루 수십 건의 민원을 응대하는 읍·면·동 민원창구 공무원들의 이야기다.
김보라 안성시장은 2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민원업무 담당 공직자들과의 간담회 내용을 공유했다. “가족관계증명서, 인감증명 등 다양한 증명서를 발급하는 분들입니다. 특별히 힘든 민원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답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라는 글귀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김 시장이 소개한 사례는 단순한 민원 응대의 범위를 훌쩍 벗어난다. 한 공무원이 인감증명서 위임장을 대리인이 작성하려 하자, 규정상 본인이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러자 민원인은 종이를 찢고 볼펜을 가림막 너머로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대해 김 시장은 “이 공무원이 뭘 잘못했나요? 설사 잘못이 있었다 해도 이래도 되는 걸까요?”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안성시 공직자들에 따르면 고참 직원들은 물론이고, 이제 막 첫 공직 생활을 시작한 20대 젊은 직원들까지 크고 작은 언어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공무원을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김 시장은 “산전수전 다 겪은 고참 공직자들도 아파한다. 따뜻한 말 한마디가 간절한 이들이 많다”라며 심경을 전했다.
읍·면·동 행정복지센터 민원창구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하루 수십 건의 민원인을 응대한다. 등본, 가족관계증명서, 인감증명서 등 단순 발급 민원이 대부분이지만, 이 과정에서 갈등은 빈번하게 발생한다. 신분증을 두고 온 민원인이 본인확인을 요구받자 고성을 지르거나, 법적 증빙을 요구하면 “왜 못해주냐”는 항의가 이어지기도 한다.
한편, 일부 지자체는 이 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감정노동 보호 매뉴얼을 도입하거나, 폭언·폭행 민원인에 대해 출입금지 조치까지 취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조차 ‘시민 중심 행정’에 반한다는 비판에 부딪히기도 한다.
김보라 시장은 간담회 자리에서 “많은 분들은 ‘애쓴다’, ‘고맙다’며 따뜻한 말씀을 했다. 하지만 이유 없이 화를 내거나 물리력을 행사하는 사례도 분명 존재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공무원도 고래처럼 칭찬받으면 더 열심히 일한다. 잘못은 정중히 지적해주시고, 잘한 일은 칭찬해주세요. 고마운 일에는 감사의 인사를 나눠주세요”라고 당부했다.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민원 관련 부서 공무원 가운데 63% 이상이 감정노동으로 인해 심리적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전히 냉담하다. ‘무뚝뚝한 공무원’, ‘친절하지 않다’는 오랜 이미지가 실상과는 다르게 공무원들에게 낙인을 찍고 있는 셈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공무원도 결국 시민의 일부이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태도, 그리고 작은 존중의 표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최근 몇몇 지자체는 ‘감정노동 공무원 보호 조례’를 제정해 공직자 보호에 나서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 부산광역시 등에서는 폭언 민원인에게 경고 문구를 전달하고, 재차 폭언 시에는 법적 조치를 취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보다 더 중요한 건 ‘시민 의식의 변화’라는 지적이 많다.
김 시장은 마지막으로 “공무원도 사람이다. 잘못하면 질책받아야 하지만, 그 방식은 인격적이어야 한다”라며 “서로가 존중받을 때, 진정한 시민 중심 행정이 완성된다”라고 강조했다.
민원창구는 단지 서류가 오가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엔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시민과 공직자의 하루가 교차한다. 위임장을 대리로 쓸 수 없다는 설명이, 찢어진 종이와 욕설로 돌아오는 현실. 우리 행정의 최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조용한 갈등’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상대를 향한 따뜻한 한 마디가, 공동체 전체를 살릴 수 있다.
이코노미세계 / 김병민 기자 bmk88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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