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시대다. 얼마 전 화려하게 문을 연 가게가 어느 날 자취를 감추고, 익숙했던 간판이 어느새 다른 업종으로 바뀌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골목 상권은 대형 프랜차이즈와 경쟁해야 하고, 소비 트렌드도 끊임없이 변한다.
이처럼 숨 가쁘게 돌아가는 시장 환경 속에서도 수십 년 동안 같은 자리를 지켜온 식당들이 있다. 대를 이어 가업을 지키며 지역의 시간을 함께 견뎌온 이른바 ‘노포(老鋪)’들이다.
노포는 단순히 오래된 가게가 아니다. 그곳에는 지역의 기억과 사람들의 삶, 그리고 세월 속에서 다져진 손맛이 함께 담겨 있다.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깊은 맛은 어떤 화려한 메뉴나 마케팅으로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가치다.
경기도 곳곳에는 이런 노포들이 여전히 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기고 있다. 김포의 오래된 빵집부터 수원 시장 골목의 순댓국집, 파주 전통 중화요리집, 안산의 칼국수집, 양평의 한옥 식당, 이천의 전골 전문점까지. 각기 다른 음식과 이야기 속에는 한결같이 ‘시간의 힘’이 담겨 있다.
김포 사우동의 한 상가. 아침 8시가 되면 오븐에서 막 구워낸 빵 냄새가 골목을 채운다. ‘쉐프부랑제’는 하루의 시작을 빵 굽는 향기로 알리는 오래된 제과점이다.
이곳을 운영하는 이병재 대표는 전북 고창 출신으로 젊은 시절부터 제빵의 길을 걸었다. 군산의 유명 빵집 이성당과 마산 코아양과 등에서 기술을 배우며 경험을 쌓았다. 이 대표는 1989년 서울 양재동에서 첫 개인 빵집을 열었고, 2002년 김포 사우동으로 이전해 지금의 쉐프부랑제를 시작했다.
현재 매장에서 판매하는 빵 종류만 100여 가지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수제 단팥을 넣은 쌀단팥빵, 피칸이 가득한 엘리게이터, 크림치즈를 넣은 당근크림치즈파운드는 대표 인기 메뉴다. 진열대에 올리기가 무섭게 팔려나갈 정도다.
이곳의 또 다른 특징은 ‘가업의 계승’이다. 이제는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반죽을 만지며 빵을 굽는다. 한 세대가 쌓아온 기술과 경험이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쉐프부랑제의 빵에는 단순한 맛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세월이 만든 깊이와 가족이 이어가는 시간이 함께 들어 있다.
이어 수원 팔달문 인근 지동시장에 들어서면 순대와 곱창을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이곳은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지동 순대·곱창타운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4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켜온 가게가 있다. 바로 ‘호남순대’다.
1980년대 중반 문을 연 이 가게는 처음에는 순대만 판매했다. 이후 순댓국을 함께 내놓기 시작했는데, 깊은 국물 맛이 입소문을 타면서 손님이 늘었다. 지금은 순대곱창볶음과 순대국밥이 대표 메뉴다.
특히 순대국밥은 24시간 우려낸 사골 육수가 핵심이다. 돼지뼈만을 사용해 잡내를 줄이고 깊은 국물 맛을 살렸다. 이곳의 하루는 새벽 4시에 시작된다. 시장 상인들과 아침 손님들이 가장 먼저 찾는 집이기 때문이다. 화려한 음식은 아니지만 서민의 식탁을 지켜온 한 그릇의 힘. 그것이 호남순대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다.
이어 파주 금촌통일시장 인근에는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중화요리집이 있다. 바로 ‘덕성원’이다. 1954년에 문을 연 이곳은 현재 3대 대표가 운영하고 있으며, 주방은 4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식당 벽에는 1960년대 촬영된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덕성원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의 현재 대표 모습도 담겨 있다. 덕성원이 오랜 세월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하다.
“좋은 재료와 정성.” 해산물은 냉동을 쓰지 않고, 채소 역시 신선한 것만 사용한다. 화려한 조리법보다 기본에 충실한 방식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짜장면과 짬뽕에는 수십 년 동안 이어온 불 앞의 시간이 녹아 있다.
이어 안산 지역에서 칼국수 맛집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집이 있다. 35년 전통의 ‘이조칼국수’다. 이곳의 칼국수는 면부터 독특하다. 흑미 찰현미, 콩가루, 부추를 섞어 만든 삼색면이다. 세 가지 색이 어우러진 면은 보기에도 아름답고 소화도 잘된다. 여기에 해산물로 우려낸 국물이 더해져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을 낸다.
또 하나의 특징은 칼국수가 나오기 전에 제공되는 보리밥이다. 고추장과 무생채를 넣어 비벼 먹으면 식욕을 돋운다. 이 집의 김치는 따로 판매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3대째 이어온 모녀의 손맛이 담긴 김치 덕분이다.
이어 양평 서종면의 조용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한옥 건물이 하나 나타난다. ‘사각하늘’은 일식 스키야끼를 전문으로 하는 독특한 식당이다. 이 한옥은 일본인 건축가가 직접 지은 공간이다. 일본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 부부가 함께 운영한다. 아내는 다도와 일본식 코스 요리인 가이세키를 오래 공부했고, 남편은 한옥 건축에 매료돼 이 공간을 만들었다.
이곳의 메뉴는 단 하나, 스키야끼다. 철판에 채소를 볶은 뒤 육수를 넣고 얇게 썬 소고기를 익혀 먹는다. 마지막에는 우동으로 마무리한다. 식사는 100% 예약제로 운영된다. 별채에서는 말차 다도 체험도 가능하다.
이어 이천에서 40년 넘게 사랑받아온 전골 전문식당이 있다. ‘장흥회관’이다. 1982년 창업자는 사업 실패 후 보따리 장사를 하다가 식당을 인수하게 됐다. 간판을 새로 달 여유가 없어 이전 식당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그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표 메뉴는 낙곱전골이다. 낙지와 곱창이 어우러진 국물이 깊은 맛을 낸다. 또 다른 인기 메뉴는 차낙곱전골이다. 영업이 끝난 뒤 직원들과 식사하다가 차돌박이를 넣어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지금은 오히려 이 메뉴가 더 유명해졌다.
시간이 만든 맛의 가치 음식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다. 그 안에는 한 가족의 역사와 지역의 문화, 그리고 세월 속에서 축적된 경험이 담겨 있다.
프랜차이즈와 빠른 소비가 지배하는 시대에도 노포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수십 년 동안 한 자리를 지켜온 가게들. 그곳에서 우리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시간의 맛을 만난다.
이코노미세계 / 김장수 기자 bmk8899@naver.com
[저작권자ⓒ 이코노미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