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가서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 문화유산 지키는 첫걸음”
[이코노미세계] 천 년의 시간을 건너온 작은 상자 하나가 발걸음을 붙잡았다. 고려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났던 문화유산을 오늘의 작가가 다시 빚어낸 작품이었다.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세월 속에 가라앉은 아름다움을 조용히 품고 있었다. 그러나 작품을 바라볼수록 한 가지 질문이 따라붙는다. 우리 역사와 삶을 담은 수많은 문화유산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천아트홀에서 열린 K-뮤지엄 지역 순회전시 ‘다시 ON, 우리 문화유산’은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단순히 옛 유물을 감상하는 전시를 넘어 해외에 흩어진 우리 문화유산을 기억하고 그 가치를 다시 불러내는 자리다.
성수석 이천시장은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천아트홀에서 열린 전시 개막식 참석 소식을 전했다. 전시장을 둘러보던 성 시장의 눈길을 붙잡은 것은 작가 김성운이 재현한 고려시대 문화유산 ‘옥제당초길상문함’이었다.
작품 앞에서 마주한 것은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우리 문화유산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고국을 떠나 해외에 머물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이 2026년 발표한 통계를 인용한 성 시장의 설명에 따르면 해외로 유출된 우리 문화유산은 25만 점을 넘어선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전쟁과 사회적 혼란, 국력이 약했던 시기 등 우리 의사와 무관한 과정에서 해외로 빠져나갔다.
문화유산 환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세계 곳곳의 박물관과 미술관, 대학, 개인 소장가 등에 한국 문화유산이 흩어져 있다. 그 하나하나에는 제작된 시대와 그것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삶, 당시의 기술과 미의식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때문에 문화유산을 단순한 ‘옛 물건’으로 바라봐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성 시장은 이번 전시를 소개하며 “문화재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 조상의 시간이고 우리 아이들의 뿌리”라며 “잊으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기억해야 돌아올 길이 열린다”고 강조했다.
짧은 말이지만 문화유산 환수의 본질을 짚는다. 해외 문화유산을 되찾는 작업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소장 경위를 확인해야 하고 반출 과정을 조사해야 한다. 때로는 국가와 국가가 협의해야 하고 소유자와의 협상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제도적·외교적 과정에 앞서 필요한 것은 국민적 관심이다.
존재조차 모르는 문화유산을 되찾기는 어렵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아야 찾을 수 있고, 왜 돌아와야 하는지 공감해야 환수를 위한 사회적 힘도 생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문화유산 환수라는 다소 무거운 주제를 시민의 일상 가까이 가져왔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전시장에 들어가 유물을 바라보고, 설명을 읽고, 그 유물이 어떤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는지 생각하는 행동 자체가 문화유산을 기억하는 첫 단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은 ‘재현’을 통한 기억의 복원이다. 성 시장이 소개한 ‘옥제당초길상문함’ 역시 과거의 문화유산을 오늘의 공간으로 불러낸 작품이다. 원형 문화유산이 가진 역사성과 아름다움을 현대인이 다시 마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문화유산의 가치는 반드시 원본 앞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원형을 충실히 연구하고 재현하는 과정 역시 과거의 기술과 미의식을 오늘의 세대에게 전달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특히 도자 문화의 역사를 품고 있는 이천에서 이러한 전시가 열린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이천은 오랫동안 도자 문화와 함께 성장해온 도시다. 흙을 고르고 형태를 빚어 불에 굽는 과정에는 오랜 기다림과 장인의 기술이 필요하다. 수백 년 전 장인들의 손끝에서 완성된 도자 문화와 오늘날 이천의 도예 전통은 시대를 달리하면서도 하나의 문화적 맥락으로 이어진다.
성 시장 역시 “돌아오지 못한 유산을 ‘다시 켜는(ON)’ 자리”라는 의미에서 이번 전시의 가치를 설명하며 “도자기의 고장 이천에서 이 전시가 열린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사명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다시 ON’이라는 전시 제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원을 켜듯 잊혀졌던 문화유산의 기억을 다시 켠다는 의미가 담겼다. 물리적으로 해외 문화유산을 당장 국내로 가져올 수 없더라도 그 존재와 의미를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먼저 되돌려 놓자는 것이다.
이는 문화유산 환수의 범위를 한층 넓게 바라보게 한다. 환수는 반드시 물리적인 귀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와 기록, 디지털 복원, 재현, 전시, 교육 역시 문화유산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과정이 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관심과 공감대는 장기적으로 실제 문화유산 환수의 기반이 된다.
문화유산 환수라고 하면 흔히 정부나 전문기관의 영역으로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해외 소재 문화유산의 위치와 소유 관계를 파악하고 환수 협상을 진행하는 데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문화유산을 지키고 기억하는 일까지 전문가만의 영역일 수는 없다.
전시장을 찾는 시민 한 사람, 부모와 함께 유물을 바라보는 어린이 한 명의 관심도 문화유산을 지키는 힘이 될 수 있다.
성 시장이 시민들에게 가족과 함께 전시장을 찾아달라고 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아이 손을 잡고 이천아트홀에 오셔서 유물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함께 읽어달라”며 “그 발걸음 하나가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모여 환수의 힘이 된다”고 말했다.
문화유산 교육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의 역할은 특히 중요하다. 현재 세대에게 문화유산이 과거의 흔적이라면 미래 세대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통로다.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접했던 문화유산을 실제 전시장에서 보고 이야기를 듣는 경험은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
‘왜 이 문화유산은 해외에 있을까’, ‘어떻게 우리나라를 떠났을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전시는 단순한 관람을 넘어 살아 있는 역사교육이 된다. 문화유산 환수의 출발점 역시 이런 질문이다.
이번 전시는 이천이라는 도시의 문화적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지역 간 경쟁의 기준이 과거 산업단지와 도로, 인구 증가 등 양적 성장에 집중됐다면 이제는 도시가 가진 문화와 역사, 콘텐츠의 가치가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사람들이 한 도시를 기억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기업이 많은 도시, 아파트가 많은 도시만으로는 지속적인 도시 브랜드를 만들기 어렵다. 그 도시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문화와 역사,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천에는 ‘도자기’라는 분명한 문화적 자산이 있다. 오랜 도예 전통과 도자 산업, 축제와 문화행사 등을 통해 형성된 이천의 이미지는 다른 도시가 쉽게 복제할 수 없는 자산이다. 여기에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와 해외 문화유산 환수라는 시대적 메시지가 더해진다면 이천의 문화 콘텐츠는 더욱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문화유산을 단순히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과 체험, 지역 관광, 도예 산업과 연계할 경우 지역경제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전시를 보기 위해 지역을 방문하고, 지역의 도자 문화를 체험하고, 주변 관광지와 상권을 이용하는 흐름을 만들어낸다면 문화는 지역경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결국 문화도시의 경쟁력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미 가진 문화자산을 어떻게 해석하고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 시민과 방문객에게 전달하느냐가 중요하다.
이번 ‘다시 ON, 우리 문화유산’ 전시는 이천이 가진 도자 문화의 정체성을 우리 문화유산 전체의 이야기로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문화유산 전시의 가장 큰 숙제 가운데 하나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수백 년, 수천 년 전 만들어진 유물은 오늘을 살아가는 시민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유리 진열장 속 문화재를 잠시 바라본 뒤 설명을 읽고 지나치는 방식만으로는 그 문화재가 가진 역사적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기 어렵다.
이번 전시가 던지는 ‘기억’이라는 메시지는 그래서 주목할 만하다. 문화유산을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그 시대의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다. 누가 만들었고, 어떤 사람이 사용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 남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문화유산은 더 이상 박물관 속 낯선 물건이 아니다.
특히 해외로 떠난 문화유산은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도 연결된다. 전쟁과 혼란, 국권 상실과 빈곤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많은 문화유산이 고국을 떠났다. 각각의 문화유산이 지나온 길을 되짚는 작업은 결국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되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화유산 환수는 단순히 ‘우리 물건을 되찾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과거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 넘겨주는 과정이다.
거대한 문화유산 정책도 결국 시민의 관심에서 출발한다.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모든 시민이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 해외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문화재를 조사할 수도 없고 직접 환수 협상에 참여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전시장을 찾고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일이다. 아이에게 문화유산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다. 해외에 우리 문화유산이 얼마나 많이 흩어져 있는지 관심을 갖는 일이다.
성 시장은 이를 “찾아가서, 바라보고, 기억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은 거창한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문화유산은 과거가 남겨놓은 정지된 물건이 아니다. 현재의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할 때 비로소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살아 있는 유산이 된다. 반대로 아무리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도 사람들이 존재를 잊는 순간 역사와 현재를 연결하는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천아트홀에서 다시 켜진 문화유산의 기억이 특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천 년 전 장인이 남긴 아름다움에서 시작한 한 번의 발걸음이 해외에 흩어진 25만여 점의 문화유산을 생각하게 하고, 다시 미래 세대에게 무엇을 물려줘야 하는지를 묻게 한다.
해외로 떠난 문화유산이 모두 돌아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나 돌아올 길을 만드는 첫걸음은 지금 시작할 수 있다. 보고,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이천에서 ‘다시 ON’된 문화유산의 불빛은 그래서 단순한 전시장의 조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역사를 다시 밝히고, 흩어진 문화유산이 언젠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사회적 기억을 켜는 불빛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시작점에 도자기의 도시 이천이 서 있다.
이코노미세계 / 이해창 기자 okna999@naver.com
[저작권자ⓒ 이코노미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