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 자연과 역사, 전통예술이 어우러진 특별한 공연이 경기도 남양주의 실학박물관에서 펼쳐진다. 판소리와 마당극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번 공연은 관객이 공연장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예술을 만나는 새로운 방식의 문화 체험을 제시한다.
경기문화재단 실학박물관은 가을을 맞아 시민과 관광객을 위한 전통예술 공연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공연은 다산 정약용의 정신이 깃든 공간인 다산정원과 정약용 유적지를 배경으로 진행되며, 역사적 장소와 공연이 결합된 야외 문화 프로그램으로 기획됐다.
이번 공연은 단순한 문화행사를 넘어 역사와 철학, 그리고 예술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과 실학사상을 조명하는 작품들이 중심을 이루며, 전통예술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무대를 선보인다.
실학박물관이 준비한 이번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공간’이다. 공연은 일반 공연장이 아니라 다산정원과 정약용 유적지 일대에서 진행된다. 관객은 자연 속에서 전통 공연을 감상하며 역사적 공간이 지닌 의미를 동시에 체험하게 된다.
기획 의도 역시 여기에 있다. 전통 공연을 특정 무대 안에 가두기보다 자연과 역사 공간 속으로 확장해 관객과 보다 가까이 호흡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관객들은 잔디와 나무가 어우러진 야외 공간에서 판소리의 깊은 울림을 듣고, 유적지 곳곳을 이동하며 펼쳐지는 마당극을 체험하게 된다. 공연과 자연, 역사 공간이 어우러지며 공연 자체가 하나의 문화 여행이 되는 셈이다.
이번 공연 프로그램 가운데 핵심은 광복 8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특별공연 ‘광복열전’이다.
이 공연은 실학사상과 독립운동 정신의 연결고리를 예술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실학은 실용과 민본을 강조한 사상으로, 조선 후기 사회개혁을 추구했던 학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학문적 흐름에 머물지 않고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자존과 독립 의식을 지탱하는 정신적 토대로 작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학박물관은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공연을 통해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이번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공연은 두 편의 창작 판소리 작품과 한 편의 마당극으로 구성됐다. 각각의 작품은 독립운동과 실학사상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며 관객에게 역사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 번째 무대는 창작 판소리 ‘안중근’이다. 공연은 9월 20일 오후 2시 30분, 실학박물관 다산정원에서 열린다. 이 작품은 안중근 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창작 판소리다. 특히 ‘입체창’이라는 독특한 형식이 눈길을 끈다.
입체창은 한 명의 소리꾼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전통 판소리와 달리 여러 명의 소리꾼이 등장 인물별로 배역을 나누어 공연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판소리의 서사적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보다 드라마틱한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광대이자 전통예술가로 평가받는 임진택 명창이 무대를 이끈다. 여기에 젊은 소리꾼들이 참여해 각 인물의 성격과 감정을 다양한 목소리로 표현한다.
작품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특히 의거까지 이어지는 엿새간의 긴박한 상황을 영화적 구성으로 재현해 관객들에게 생생한 역사적 체험을 제공한다.
전통 판소리의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연출을 더해 젊은 세대에게도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9월 21일에는 또 다른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가 관객을 만난다. 이 작품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을 판소리로 풀어낸 대작이다. 작품의 서사는 김구 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기반으로 한다.
공연은 임진택 명창과 왕기철·왕기석 형제 명창이 함께 참여하는 ‘3인 3색 완창 판소리’ 형식으로 진행된다. 세 명의 명창이 각기 다른 색깔의 소리를 통해 김구 선생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공연 시간만 3시간에 이르는 대작으로, 김구 선생의 어린 시절부터 임시정부 활동, 광복의 기쁨, 그리고 분단의 비극까지 격동의 삶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담아냈다.
이 작품은 이미 국내외에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은 바 있다. 국회와 백범기념관, 정동극장 등에서 공연됐으며 하와이 등 해외에서도 초청 공연을 통해 호평을 받았다. 현재까지 100회 이상 공연되며 판소리 창작 공연 가운데 대표적인 역사 서사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9월 27일과 28일에는 마당극 ‘정약용 선생님과의 하루’가 관객을 만난다. 이 공연은 단순한 관람형 공연이 아니라 관객이 함께 이동하며 체험하는 ‘이동형 교육극’이다. 공연은 실학박물관 주차장에서 출발해 정약용 유적지를 오가며 진행된다.
각 장소의 역사적 의미에 맞춰 장면이 펼쳐지는 방식으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공연을 감상하게 된다. 작품은 정약용의 애민정신과 실학사상을 쉽고 흥미롭게 전달하는 내용으로 구성됐다. 20년 이상 공연되며 꾸준히 사랑받아온 작품으로, 역사 교육과 공연 예술을 결합한 대표적인 체험형 공연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공연예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장소 특정적 연극(site-specific theatre)’ 형식의 초기 모델로도 알려져 있다. 유적지 답사와 연극이 결합된 독특한 형식은 관람객에게 강한 몰입감과 현장감을 제공한다.
이번 공연의 예술총감독은 판소리와 마당극 분야에서 50년 이상 활동해 온 임진택 명창이 맡았다. 임 감독은 작품 집필과 작창을 총괄하며 공연 전반을 이끌었다. 세 편의 공연 모두에 직접 참여해 무대의 완성도를 높일 예정이다.
임 감독은 오랜 시간 전통예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이어온 인물이다. 특히 판소리와 마당극을 통해 역사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여 왔다. 또,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전통예술 공연이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의 장이 되길 바란다”며 “광복 80주년의 가을을 맞아 역사와 정신을 문화예술로 되새기는 뜻깊은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실학박물관은 이번 공연을 통해 실학의 가치를 현대 사회 속에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김필국 실학박물관 관장은 “이번 공연은 단순한 예술 행사가 아니라 실학이라는 우리의 사상적 자산을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되새기는 자리”라고 강조했다.
이어 “실학자들과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실용과 민본의 정신을 오늘날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 실학의 가치가 지금 시대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은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 특히 의미 있는 문화 체험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소재로 한 판소리 공연, 유적지 탐방과 결합된 마당극, 그리고 자연 속에서 즐기는 야외 공연이라는 요소가 결합돼 교육과 문화 체험을 동시에 제공하기 때문이다.
가을 바람이 부는 정원에서 울려 퍼지는 판소리와 마당극. 실학의 정신과 독립의 역사가 어우러진 이번 공연은 시민들에게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특별한 가을의 기억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코노미세계 / 이해창 기자 okna9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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