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여권을 들고 공항으로 향하지 않았다. 비행기 표도 필요하지 않았다. 출발지는 경기 안성시 공도도서관이었다. 목적지는 한국에서 중국과 일본을 거쳐 미국·영국·프랑스·독일까지 모두 7개 나라. 이동 수단은 ‘책’이었다.
무더운 여름밤, 평소 조용히 책장을 넘기던 도서관이 세계 각국을 여행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변신했다.
김보라 안성시장은 2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얼마 전 단 하룻밤에 7개 나라를 다녀왔다”며 공도도서관에서 펼쳐진 특별한 여름밤 풍경을 소개했다.
물론 실제 해외출장 이야기는 아니었다. 공도도서관을 출발점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의 문화와 책을 만나도록 꾸민 체험형 독서 프로그램이었다. 책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나라별 다양한 체험을 더하면서 도서관을 하나의 ‘세계여행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시민들이 여행용 캐리어를 직접 끌고 도서관을 찾았다는 점이다. 휴가를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캐리어를 가져오면 그 안에 책을 가득 담아 빌려 갈 수 있도록 한 ‘캐리어 대출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도서관과 책, 그리고 여행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하나의 이야기로 묶은 것이다.
이번 행사의 특징은 도서관이라는 익숙한 공간을 ‘여행’이라는 낯선 방식으로 다시 바라보게 했다는 데 있다. 공도도서관을 출발해 한국을 시작으로 중국과 일본, 미국과 영국, 프랑스와 독일을 차례로 경험하는 방식이다. 참가자들은 책과 함께 각 나라를 만나고 다양한 체험을 즐겼다.
도서관은 오랫동안 책을 읽거나 빌리는 공간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최근 공공도서관의 역할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 부모가 함께 문화를 경험하고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찾는 생활문화 공간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공도도서관의 이번 프로그램 역시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특히 어린이에게 독서를 ‘공부’나 ‘과제’가 아니라 ‘여행’과 ‘놀이’의 경험으로 연결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책 속에서 접했던 나라를 하나씩 찾아가듯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 문화에 관심을 갖도록 한 것이다.
김 시장도 이를 ‘여행’으로 표현했다. “공도도서관에서 출발해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까지 책과 함께 세계를 여행하고, 나라별 다양한 체험까지 즐기는 정말 특별한 여름밤이었다”고 했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지역 도서관에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다.
행사의 또 다른 주인공은 ‘캐리어’였다. 여행을 상징하는 가장 익숙한 물건인 캐리어를 도서관 대출 행사에 접목했다. 방식은 간단하면서도 파격적이었다. 시민이 직접 캐리어를 가져오면 그 안에 책을 가득 담아 빌려 갈 수 있도록 했다.
김 시장에 따르면 실제 많은 시민이 캐리어를 끌고 도서관을 찾았다. 행사가 끝난 뒤에는 빈 캐리어 대신 책으로 가득 찬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김 시장은 “정말 많은 분들이 캐리어를 끌고 오셨고, 여행을 마친 뒤에는 책으로 가득 찬 캐리어를 끌고 환하게 웃으며 돌아가시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고 전했다.
‘책을 많이 빌려 가세요’라는 일반적인 도서관 안내 대신 ‘캐리어를 가져오세요’라는 재미있는 장치를 사용한 셈이다. 이 같은 방식은 시민들에게 도서관 방문 자체를 하나의 이벤트로 만들었다.
여름휴가 때 옷과 여행용품을 넣는 캐리어가 이날만큼은 책을 담는 가방이 됐다. 여행을 떠날 때 느끼는 설렘을 책을 고르고 빌리는 과정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일상적인 행위가 하나의 특별한 경험으로 변한 순간이다.
이번 프로그램이 갖는 의미는 어린이 독서문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책 읽기는 자칫 학교 공부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독후감이나 독서기록장처럼 결과물을 요구하는 방식이 반복될 경우 책 자체의 즐거움보다 의무감이 앞설 가능성도 있다.
반면 공도도서관은 책과 여행, 체험을 연결했다. 책을 읽는 행위를 특정 국가와 문화를 만나는 과정으로 확장하고,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독서의 문턱을 낮췄다.
특히 부모와 아이가 함께 도서관을 방문할 수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무더위가 이어지는 여름철에는 어린 자녀를 둔 가정에서 마땅한 나들이 장소를 찾는 것도 고민거리다. 야외활동에는 폭염이라는 부담이 따른다. 반면 도서관은 가까운 생활권 안에서 책과 문화 프로그램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공공공간이다.
공도도서관의 이번 행사는 바로 이런 도서관의 장점을 ‘여름밤 세계여행’이라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단순히 책을 대출하는 공간에 머물지 않고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생활문화 거점으로 도서관의 역할을 확장한 것이다.
공공도서관이 풀어야 할 과제 가운데 하나는 시민들이 도서관을 지속적으로 찾도록 만드는 것이다. 좋은 책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은 기본이다. 여기에 시민이 직접 참여하고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가 더해지면 도서관의 활용 방식은 더욱 다양해질 수 있다.
공도도서관의 ‘7개국 여행’은 거창한 해외여행 대신 책을 매개로 세계를 만나는 경험을 제시했다. 특히 캐리어라는 친숙한 소품을 활용해 시민들의 호기심을 끌어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어린이에게는 놀이가 되고 부모에게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추억이 된다.
무엇보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시민의 손에는 책이 남는다. 캐리어에 가득 담긴 책이 각 가정으로 이동하면서 도서관에서 시작된 행사가 집 안의 독서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행사장에서 즐기고 끝나는 일회성 체험과 다른 지점이다. 도서관에서 여행을 경험하고, 여행의 ‘기념품’처럼 책을 빌려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셈이다.
공공도서관의 경쟁력은 규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시민이 편안하게 찾아오고, 책과 문화를 매개로 어떤 경험을 만들어 주느냐가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생활권 가까이에 위치한 지역 도서관은 대규모 문화시설과 다른 강점을 갖는다. 멀리 이동하지 않고도 어린이부터 부모,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도도서관에서 열린 이번 프로그램도 이런 생활밀착형 문화공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도서관을 세계여행의 출발점으로 설정하고, 국가별 체험을 마련한 뒤 캐리어 대출 이벤트까지 연결했다. 하나의 주제 아래 공간과 체험, 책 대출을 자연스럽게 묶었다.
시민 입장에서는 ‘도서관 행사에 참여했다’기보다 ‘가족과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는 기억을 남길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공도서관의 역할 변화가 읽힌다. 과거 도서관이 책을 보관하고 제공하는 기능에 무게를 뒀다면, 앞으로의 도서관은 시민들이 책을 매개로 만나고 경험하며 기억을 쌓는 공간으로 확장될 수 있다.
화려한 프로그램 뒤에는 이를 준비한 사람들이 있었다. 김 시장은 이번 행사가 공도도서관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만들어졌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도서관 프로그램은 공간만 마련한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참가자들의 동선을 준비하고 각 체험을 운영하며 어린이와 가족들이 불편 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현장을 관리하는 손길이 필요하다. 김 시장이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을 별도로 언급한 것도 이런 이유로 풀이된다.
시민에게는 하룻밤의 즐거운 여행이지만,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행사 준비부터 현장 운영까지 여러 사람의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공도서관이 주민의 생활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시설이나 장서뿐 아니라 이처럼 시민과 만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공도도서관에서 시작된 세계여행은 결국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한국에서 독일에 이르는 7개 나라를 체험했지만 비행기를 타지 않았고, 여행을 마친 시민들이 집으로 가져간 것은 관광 기념품이 아니라 책이었다.
이 작은 반전이 이번 프로그램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도서관은 익숙한 공간이다.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일도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이다. 그러나 여기에 ‘여행’이라는 이야기를 입히자 익숙했던 도서관이 새로운 공간으로 바뀌었다.
김 시장은 시민들에게 “무더운 여름, 아이들과 함께 어디로 갈지 고민이라면 가까운 도서관으로 떠나보세요”라고 권했다. 이어 “책과 함께하는 여행은 생각보다 훨씬 멀리, 그리고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라고 했다.
책 한 권을 펼치면 공간의 경계는 사라진다. 중국도 갈 수 있고 일본도 갈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을 지나 프랑스와 독일까지 갈 수 있다. 공도도서관이 보여준 것은 어쩌면 도서관이 가진 가장 오래되고도 새로운 힘이다.
멀리 떠나지 않고도 더 먼 곳을 경험하게 하는 힘이다. 그리고 그 여행의 시작은 거창하지 않다. 동네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가 책 한 권을 고르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코노미세계 / 오정희 기자 oknaj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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