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재난 상황에서는 몇 초의 차이가 생사를 가를 수 있다. 화재가 발생해 연기가 건물을 뒤덮는 순간 대피용 마스크가 눈앞에 있더라도 손이 닿지 않는다면 사실상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비상용품 보관함을 열 수 없거나 어디에 설치돼 있는지 알 수 없다면 ‘안전을 위해 설치한 시설’이라는 의미 역시 퇴색한다.
특히 휠체어를 이용하거나 팔과 손을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려운 장애인, 화재 발생 사실이나 대피용품의 위치를 즉각 파악하기 어려운 시각·청각장애인에게는 작은 불편 하나가 생명과 직결되는 장벽이 될 수 있다.
경기도의회에서 안전시설 정책의 기준을 ‘얼마나 설치했느냐’에서 ‘실제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느냐’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이유다.
경기도의회 보건복지위원회 김현덕 의원은 5일 사단법인 장애인노인자립지원협회 권기범 사무총장과 정담회를 갖고 장애인과 노인 등 안전취약계층이 화재 대피용품을 실제 이용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어려움과 개선방안을 논의했다.
논의의 출발점은 단순했다. 안전시설이 설치돼 있다는 사실만으로 과연 시민의 안전이 확보됐다고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현재 공공청사와 복지시설 등에는 화재 대피용 마스크를 비롯해 각종 안전용품이 설치돼 있다. 문제는 실제 재난 상황에서 장애인과 노인, 어린이 등이 이들 용품을 얼마나 쉽고 빠르게 찾아 사용할 수 있느냐다.
정담회에서는 안전용품이 높은 곳에 설치돼 있거나 보관함을 쉽게 열기 어려운 사례가 문제로 제기됐다. 휠체어 이용자는 비장애인과 손이 닿는 범위 자체가 다를 수 있다. 상지 기능이 제한된 장애인 역시 복잡하거나 힘을 줘야 하는 보관장치를 신속하게 열기 어렵다.
평상시라면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만 화재와 같은 긴급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연기와 불길 속에서 모든 사람이 동시에 대피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누군가의 도움을 전제로 설계된 안전시설은 제 기능을 하기 어렵다.
시각·청각장애인이 직면하는 문제도 있다.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를 빠르게 인지하기 어렵거나, 대피용품이 어느 곳에 설치돼 있는지 확인하기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와 노인 역시 마찬가지다. 갑작스러운 화재로 연기가 발생하고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평소 눈에 잘 띄던 대피용품조차 신속하게 찾고 사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 정담회에서 제기됐다.
결국 안전용품의 숫자뿐 아니라 높이와 위치, 보관 방식, 안내 체계, 사용법까지 이용자의 특성에 맞게 설계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김 의원과 권 사무총장은 안전용품을 단순히 비치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장애 유형과 이용자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해 설치 위치와 사용 방법, 안내 체계를 종합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시설이 완공된 이후 문제를 발견해 보완하는 방식보다는 계획과 설계 단계부터 장애 당사자의 의견과 실제 이용 경험을 반영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장애인과 노인, 어린이 등 누구라도 위급한 순간 대피용품의 위치를 쉽게 인지하고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처음부터 설계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는 ‘무장애 환경’에 대한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단순히 경사로를 설치하거나 장애인 화장실을 만드는 것만으로 무장애 환경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설에 접근하는 순간부터 이용하고 빠져나오는 모든 과정에서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특히 재난 대응시설은 평상시 편의시설보다 훨씬 엄격한 이용자 중심의 기준이 요구된다. 김 의원은 “화재 대피용품의 접근성은 평소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문제”라며 “재난은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에 일상에서 미처 살피지 못한 작은 불편과 장벽이 위급한 순간에는 생명과 직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안전용품을 설치했다는 사실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강조했다. 실제 이용자의 눈높이에서 누구나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며 장애인이 별도의 도움 없이 안전시설과 대피용품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무장애 환경이라는 입장이다.
정담회에서 나온 문제의식은 현장점검으로 이어졌다. 김 의원은 정담회 이후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 이른바 ‘BF(Barrier Free)’ 인증을 받은 GH복합시설관을 찾아 건물 내 안전·편의시설을 직접 살펴봤다.
BF 인증을 받은 시설이라면 일반적으로 장애인과 노인, 임산부 등이 시설을 접근하고 이용하는 데 불편이 적도록 조성됐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확인된 상황은 ‘인증’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줬다. 가장 눈에 띈 문제 가운데 하나는 화재 대피용 마스크의 설치 높이였다.
마스크가 비치돼 있었지만 휠체어 이용자의 손이 닿기 어려운 높이에 설치돼 있었다. 비상상황에서 휠체어 이용자가 혼자 대피용품을 꺼내 사용해야 한다면 접근성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구조다.
장애인 화장실에서도 여러 문제가 확인됐다. 물 내림 센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소변기 지지대가 흔들리는 등 시설 관리가 미흡한 부분이 발견됐다.
화장실 출입구 역시 별도의 문 없이 천으로만 가려져 있어 이용자의 사생활을 충분히 보호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드러났다. 각각의 문제만 놓고 보면 사소한 시설관리 문제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장애 당사자 입장에서는 다르다. 비장애인에게는 작은 불편으로 끝날 문제가 장애인에게는 시설 이용 자체를 어렵게 만드는 장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현장점검이 던지는 질문은 분명하다. ‘BF 인증을 받은 시설은 실제 이용 과정에서도 계속 무장애 시설로 유지되고 있는가’라는 문제다.
건물을 설계하고 준공하는 과정에서 관련 기준을 충족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설이 고장 나거나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당초 인증 취지가 현장에서 제대로 구현되기 어렵다.
김 의원 역시 이 부분에 주목했다. “BF 인증을 받은 건물에서도 실제 이용 과정에서는 여러 불편과 안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현장에서 확인했다”며 인증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시설이 본래 취지에 맞게 작동하고 관리되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무장애 환경 정책의 중심을 ‘인증 시점’에서 ‘이용 전 과정’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건물을 지을 때 기준을 충족했는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 운영 과정에서 장애인이 불편 없이 이용하는지, 안전시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고장 난 시설은 신속하게 수리되는지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관리체계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다.
안전취약계층을 고려한 재난 대응에서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자립적인 대피 가능성’이다. 장애인이 재난 상황에서 안전시설을 이용할 때 항상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해당 시설의 접근성이 충분하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화재 대피용 마스크 하나를 설치하더라도 휠체어 이용자가 스스로 꺼낼 수 있는 높이인지, 손의 움직임이 제한된 이용자가 보관함을 쉽게 열 수 있는지 등을 세밀하게 따져야 하는 이유다.
시각장애인이 대피용품 위치를 알 수 있는 안내 방식이나 청각장애인이 화재 발생을 즉시 인지할 수 있는 체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번 정담회에서도 안전용품 설치 위치와 사용 방식뿐 아니라 안내 체계를 함께 개선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설치돼 있으니 안전하다’는 공급자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실제 이용자가 사용할 수 있어야 안전하다’는 수요자 중심의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설을 만든 뒤 장애인이 불편을 제기하면 고치는 사후 대응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처음 시설을 계획하고 설계할 때부터 실제 이용자의 경험을 반영하면 상당수 문제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휠체어 이용자의 손이 어느 높이까지 닿는지, 시각장애인이 어떤 방식의 안내를 쉽게 인식하는지, 상지 기능이 제한된 사람이 어떤 구조의 보관함을 열기 쉬운지는 실제 당사자의 이용 경험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무장애 환경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장애 당사자를 단순한 정책 수혜자가 아니라 시설 설계와 평가에 참여하는 주체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된다.
김 의원과 권 사무총장도 계획과 설계 단계부터 장애 당사자의 의견과 이용 경험을 세심하게 반영해야 한다는 데 공감했다. 장애인뿐 아니라 노인과 어린이 등 다양한 이용자가 위급한 상황에서 대피용품을 쉽게 인지하고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정담회와 현장점검은 안전시설 정책에서 놓치기 쉬운 한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시설을 설치했다고 해서 안전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며, 인증을 받았다고 해서 무장애 환경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화재 대피용 마스크가 있어도 손이 닿지 않는다면 사용할 수 없다. 장애인 화장실이 있어도 센서가 작동하지 않거나 지지대가 흔들린다면 이용자는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국 안전시설의 가치는 설치 개수나 인증 여부가 아니라 위급한 순간 실제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특히 장애인과 노인, 어린이처럼 재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는 시민들에게는 이러한 원칙이 더욱 중요하다.
김 의원은 “안전과 편의는 시설을 설치하거나 인증을 받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며 계획과 설계에서부터 설치와 유지관리까지 장애 당사자의 의견과 이용 경험을 세심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현장점검에서 확인된 것은 거대한 구조적 결함만이 아니었다. 손이 닿지 않는 대피용 마스크, 작동하지 않는 센서, 흔들리는 지지대, 사생활 보호가 충분하지 않은 출입구처럼 얼핏 작아 보이는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재난과 안전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작은 장벽’이 결코 작지만은 않다. 안전정책의 마지막 기준은 시설을 만든 행정기관이나 인증기관이 아니라 결국 그 시설을 이용하는 시민이어야 한다.
특히 위급한 순간 누구의 도움도 기다릴 수 없는 상황에서 장애 유무나 나이와 관계없이 스스로 안전시설을 찾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설치된 안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안전’으로, ‘인증받은 무장애’에서 ‘일상에서 작동하는 무장애’로 정책의 기준을 옮기는 것.
김현덕 의원이 정담회와 현장점검을 통해 제기한 문제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재난이 닥친 바로 그 순간, 이 시설을 누구나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가.” 그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무장애 안전환경은 완성됐다고 할 수 있다.
이코노미세계 / 이주은 기자 pin827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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