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사실적 조형물 등 56점 전시, 인간·동물·기술의 경계를 넘어 돌봄과 연대 모색
[이코노미세계] 처음 마주한 순간에는 낯설고 기괴하다. 인간을 닮았지만 인간이라고 부르기 어렵고, 동물의 모습을 품고 있으면서도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들이 관람객을 바라본다. 주름과 솜털, 피부의 질감까지 살아 있는 듯 정교하게 표현된 모습은 호기심과 불편함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작품 앞에 잠시 머물면 첫인상과는 다른 풍경이 보인다. 낯선 생명체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는다. 품에 안고, 몸을 기대고, 상처 입은 존재를 보살핀다. 외형의 차이를 넘어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연약함과 온기가 전해진다.
세계적인 현대미술가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국내 첫 개인전 ‘패트리샤 피치니니: 킨쉽(Kinship)’이 수원시립미술관 행궁 본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인간과 동물, 자연과 기술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는 시대에 서로 다른 존재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다.
이재준 수원특례시장은 25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전시 개최 소식을 알렸다. 이 시장은 “처음에는 다소 기괴하고 낯설게 느껴지지만, 작품 속 생명체들이 서로를 안고 보살피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면 연약함과 따뜻함을 발견하게 된다”고 소개했다.
이어 “돌봄과 공존을 이야기하는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작품은 수원이 지향하는 가치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며 “이번 전시가 시민들이 서로 다른 존재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도시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피치니니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은 ‘관계’다. 작가는 인간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 동물과 자연,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생명체까지 우리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존재로 바라본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를 낯설거나 두려운 대상으로 구분하기보다, 함께 돌보고 책임져야 할 이웃으로 제시한다.
이번 전시 제목인 ‘킨쉽’은 혈연이나 친족관계뿐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다는 폭넓은 의미를 담고 있다. 작가는 우리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어디까지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질문한다. 가족과 이웃을 넘어 동물과 자연, 과학기술이 만들어 낸 새로운 존재까지 관계의 범위를 확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생명체는 익숙함과 낯섦이 뒤섞여 있다. 인간과 유사한 표정과 몸짓을 지녔지만 신체 일부는 동물에 가깝다. 현실에 없는 모습이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애정과 돌봄의 태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 같은 표현 방식은 관람객에게 본능적인 거부감과 연민을 동시에 일으킨다. 작가는 그 복합적인 감정을 통해 우리가 외모와 종, 능력의 차이를 기준으로 타인을 구분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한다. 작품을 보는 일은 결국 낯선 존재를 받아들이는 자신의 태도를 점검하는 과정이 된다.
전시장에서는 피치니니의 작품 세계를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56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대표적인 극사실적 조형물을 비롯해 사진과 영상, 설치, 아카이브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이 소개된다.
특히 극사실적 조형물은 살아 있는 생명체와 마주한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섬세하게 표현된 피부와 체모, 눈빛과 자세는 관람객이 작품을 단순한 조각품으로만 바라보기 어렵게 만든다. 작품 속 존재들이 금방이라도 움직이거나 말을 걸 것 같은 생생함은 피치니니 예술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러나 사실적인 표현은 작품의 외형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는 생명체의 표정과 몸짓,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연민과 책임의 문제를 끌어낸다. 관람객은 작품 속 존재가 무엇인지 판단하기에 앞서, 그 존재가 느끼는 감정과 처한 상황을 상상하게 된다.
사진과 영상, 설치 작품은 조형물에서 출발한 질문을 보다 넓은 사회적·윤리적 영역으로 확장한다. 생명공학과 인공지능, 유전자 기술 등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상황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지, 새롭게 만들어진 생명에 대해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지만 새로운 윤리적 과제도 남긴다. 기술로 생명을 바꾸거나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에는 ‘가능한가’라는 질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해도 되는가’, ‘그 결과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뒤따라야 한다.
피치니니의 작품은 이러한 문제를 설명하거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낯설지만 보호받아야 할 것 같은 존재를 관람객 앞에 놓는다. 그리고 그 존재를 바라보는 각자의 감정과 판단을 통해 기술 발전 뒤에 놓인 책임의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도록 이끈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작품 속 생명체들이 대부분 고립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서로를 끌어안거나 바라보고, 어린 존재를 보호하며 관계를 맺는다.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하기보다 차이를 지닌 채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돌봄은 강한 존재가 약한 존재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시혜와는 거리가 있다. 서로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상호적인 관계에 가깝다. 작가는 완전하고 독립적인 존재보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연결되는 존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같은 메시지는 저출생과 고령화, 1인 가구 증가 등으로 공동체의 모습이 급변하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혈연과 전통적인 가족의 범위를 넘어 지역과 사회가 어떻게 돌봄의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지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역할도 도로와 건물 등 기반시설을 공급하는 수준에 머물 수 없다. 어린이와 노인, 장애인, 이주민을 비롯해 서로 다른 조건을 지닌 시민들이 배제되지 않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도시 경쟁력의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킨쉽’은 단순히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를 넘어선다. 문화예술을 통해 우리가 살아갈 도시와 공동체의 모습을 묻는 공론의 장이 될 수 있다. 관람객은 낯선 생명체를 바라보면서 현실 속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어떤 시선으로 대했는지 자연스럽게 되돌아보게 된다.
수원은 조선시대 계획도시인 화성을 중심으로 역사와 문화가 축적된 도시다. 동시에 인구와 산업, 주거와 교통이 빠르게 변화해 온 대도시이기도 하다. 다양한 세대와 계층, 배경을 지닌 시민들이 함께 살아가는 만큼 차이를 인정하고 공동체의 연결을 회복하는 일은 중요한 도시 과제다.
이재준 시장이 이번 전시의 메시지를 수원이 지향하는 가치와 연결한 것도 이 때문이다. 피치니니가 보여주는 돌봄과 공존의 세계는 시민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포용도시,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지속 가능한 도시라는 방향과 맞닿아 있다.
문화예술은 정책이 담아내기 어려운 감정과 인식의 변화를 이끌 수 있다. 제도와 행정이 공동체의 외형을 만든다면 예술은 서로 다른 존재를 바라보는 시민의 시선을 바꾼다. 한 작품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과 연민, 불편함과 따뜻함은 타인을 이해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수원시립미술관이 행궁동이라는 역사문화 공간에서 세계적인 현대미술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과거의 유산을 보존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동시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문화예술로 질문함으로써 지역 미술관의 역할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미술관은 더 이상 작품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공간에 그치지 않는다. 시민이 사회 문제를 만나고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문화적 플랫폼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현대미술을 어렵게 느끼는 시민에게도 작품을 통해 생명과 가족, 기술과 공동체라는 익숙한 문제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수원시립미술관은 작품 전시에 더해 인문학 강좌와 아티스트 토크 등 다양한 연계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관람객이 작품의 외형적인 인상에 머물지 않고 작가의 문제의식과 시대적 배경을 깊이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취지다.
현대미술은 때때로 어렵고 난해하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피치니니의 작품처럼 낯선 생명체가 등장하는 경우에는 작품이 전달하려는 의미에 다가가기 전에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강좌와 대화 프로그램은 이러한 간극을 좁히고 관람객이 자신의 경험과 작품을 연결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작품을 감상한 뒤 생명윤리와 과학기술, 돌봄과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도 전시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생명의 다양성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생각하는 교육의 장이 되고, 성인에게는 기술 발전과 사회적 책임의 관계를 성찰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만 전시의 성과를 일회성 관람객 수에만 두지 않으려면 연령과 관심사에 맞춘 해설·교육 프로그램을 지속해서 운영할 필요가 있다. 학교와 지역 문화단체, 복지기관 등과 연계해 전시가 던진 질문을 시민사회 안으로 확장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피치니니의 작품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존의 기준을 흔든다. 익숙하고 반듯한 존재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낯설고 불완전한 존재도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 질문은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현실의 문제로 이어진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외모, 생각, 삶의 조건을 지닌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인간은 동물과 자연을 필요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가. 과학기술이 새롭게 만들어 낼 존재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피치니니의 작품은 어느 하나에도 쉬운 답을 내놓지 않는다.
다만 작품 속 생명체들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은 하나의 방향을 보여준다. 낯선 존재를 밀어내기보다 곁을 내주고, 연약함을 결함으로 판단하기보다 서로 돌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시작된 이번 전시의 질문은 미술관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도시야말로 매일 공존을 시험받는 공간이다. 차이를 이유로 경계를 세울 것인지,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들 것인지는 도시공동체가 풀어야 할 과제다.
낯설고 기괴한 생명체 앞에서 발견한 따뜻함은 결국 인간 사회를 향한 메시지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 이번 전시는 그 오래되고도 절실한 질문을 수원 시민들에게 조용히 건네고 있다.
이코노미세계 / 오정희 기자 oknajang@hanmail.net
[저작권자ⓒ 이코노미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