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세계] 남양주시 화도읍 녹촌리에서 시작된 한 기업인의 도전이 대한민국 위스키 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있다. 남양주의 맑은 물과 뚜렷한 일교차를 바탕으로 생산한 싱글 몰트 위스키가 해외시장에서 경쟁력을 인정받으면서다. 단순한 주류 생산을 넘어 제조업과 관광, 미식, 축제를 결합한 지역경제 활성화 모델로 발전할 수 있다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최현덕 남양주시장은 최근 화도읍 녹촌리에 있는 위스키 생산업체 ‘기원’을 방문해 도정환 대표와 생산 현장을 둘러보고 기업의 성장 계획과 지역 연계 방안을 논의했다. 최 시장은 29일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방문 사실을 알리며 기원을 남양주의 새로운 산업·관광 자산으로 키우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번 방문은 최 시장과 도 대표가 약 10년 만에 다시 만난 자리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최 시장이 남양주시 부시장으로 재직하던 2016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최 시장은 국내 최대 규모의 수제맥주업체로 알려졌던 ‘더 핸드앤몰트(The Hand and Malt)’를 방문해 도 대표와 대화를 나눴다.
최 시장은 당시 기록을 다시 살펴본 결과, 도 대표가 이미 수제맥주를 넘어 세계적인 위스키를 생산하겠다는 목표를 품고 있었다고 전했다. 국내 수제맥주 시장에서 성과를 거둔 데 만족하지 않고, 더 긴 시간과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위스키 산업에 도전하겠다는 구상이었다.
도 대표는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수제맥주 공장을 OB맥주에 넘긴 뒤 위스키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스코틀랜드 엔지니어들과 연구를 거듭하며 증류와 숙성 기술을 축적했고, 한국의 자연환경과 원료 특성에 맞는 위스키를 개발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기원은 지난해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미국 샌프란시스코 주류품평대회에서 최고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를 비롯해 오랜 증류 역사를 지닌 국가들과 경쟁해야 하는 국제무대에서 한국산 위스키의 품질과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현재 기원 제품은 전 세계 20여 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특히 위스키 종주국으로 불리는 스코틀랜드에서도 관심을 얻고 있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국내에서도 편의점과 군납 등으로 판매망을 넓히면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판매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 주류시장에서 위스키는 오랫동안 수입 제품 중심으로 형성돼 왔다. 소비자에게 익숙한 브랜드 대부분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미국, 일본 등에서 생산된 제품이다. 이런 시장 구조 속에서 국내에서 생산한 싱글 몰트 위스키가 해외로 수출되고 현지 소비자의 선택을 받는 것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기원이 거둔 성과는 단순히 개별 기업의 성공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지역의 물과 기후, 숙성 환경을 활용하면 세계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위스키를 생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지역의 자연환경이 제조업의 경쟁력이 되고, 기업의 브랜드가 다시 도시의 이미지를 높이는 선순환 구조도 기대할 수 있다.
기원의 영문 이름은 ‘오리진(origin)’이다. 시작과 근원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국 싱글 몰트 위스키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겠다는 기업의 방향성을 이름에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원과 남양주의 인연은 수제맥주 생산 시절부터 이어졌다. 도 대표는 남양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하고 맑은 물, 뚜렷한 일교차 등에 주목해 화도읍에 생산 기반을 마련했다. 물은 위스키의 맛과 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이며, 기온 차이는 오크통 안에서 진행되는 숙성 과정에 영향을 준다.
위스키는 증류 직후 완성되는 술이 아니다. 오크통에 원액을 넣고 오랜 기간 숙성하면서 색과 향, 맛이 만들어진다. 지역의 기후와 습도, 일교차 등은 원액과 오크통의 상호작용에 영향을 미친다. 생산지의 자연환경과 시간이 제품의 개성을 결정하는 셈이다.
남양주의 맑은 물과 계절 변화는 기원이 독자적인 맛을 구축하는 기반이 됐다. 해외 유명 위스키 생산지가 지역명 자체를 하나의 브랜드로 발전시킨 것처럼, 남양주도 장기적으로는 한국 위스키의 대표 생산지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원은 지역사회와의 상생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근로자 대부분을 지역주민으로 고용해 기업 성장의 효과가 지역 일자리로 이어지도록 하고 있다. 생산시설을 지역에 두는 데 그치지 않고 고용과 관광, 소비를 지역 안에서 연결하려는 것이다.
최 시장은 “수제맥주 생산 때부터 남양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풍부하고 맑은 물, 뚜렷한 일교차에 이끌려 터를 잡았고 대부분 지역주민을 고용하고 있다”며 “남양주에 대한 애정이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어 기쁘다”고 밝혔다.
기원이 운영하는 주말 투어 프로그램도 주목받고 있다. 위스키 생산시설과 숙성 과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국내 방문객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도 이어지고 있다.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데서 벗어나 생산 과정과 지역의 이야기를 함께 경험하려는 수요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관광시장에서는 지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방식에서 벗어나 음식과 술, 역사, 산업현장을 직접 체험하는 관광이 확산하는 추세다. 지역 특산물의 생산 과정을 보고 맛을 경험하는 산업관광은 방문객의 체류시간과 소비를 늘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기원의 위스키 투어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생산시설 방문을 주변 음식점과 카페, 자연관광지 등으로 연결하면 화도읍 일대에 새로운 관광 동선을 만들 수 있다. 외국인 방문객이 늘어나면 남양주의 도시 인지도와 지역 상권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구상이 실질적인 지역경제 효과로 이어지려면 교통과 주차, 안내체계, 숙박, 외국어 서비스 등 관련 기반을 함께 갖춰야 한다. 특정 기업 한 곳의 인기에만 의존하지 않고 주변 상인과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기원은 사업 확대에 맞춰 방문자센터를 신축하고 창고를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생산량 증가에 대응하는 동시에 방문객을 체계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최 시장은 기업의 성장과 시설 확충이 원활하게 추진될 수 있도록 관련 절차와 기반시설 등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기업 지원은 행정절차를 단축하는 데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주변 상권과의 연계, 관광상품 개발, 지역주민 고용 확대 등 기업의 성장이 지역 전체에 확산하도록 하는 정책 설계가 필요하다. 환경과 안전 기준을 충실히 지키면서 생산시설과 관광시설이 조화를 이루도록 관리하는 것도 행정의 과제로 꼽힌다.
남양주시와 기원은 위스키 산업의 미래를 논의하는 국제적 교류의 장도 마련할 계획이다. 도 대표는 내년 4월 기원에서 한국 최초의 ‘위스키 포럼’을 개최하겠다는 구상을 최 시장에게 설명했다. 이에 최 시장은 남양주시가 포럼에 함께 참여하자고 제안했다.
포럼이 성사되면 국내외 위스키 생산자와 전문가, 유통업계 관계자 등이 남양주에 모여 산업 동향과 생산기술, 수출 전략 등을 논의할 수 있다. 한국 위스키의 경쟁력을 국내외에 알리는 동시에 남양주를 관련 산업의 교류 거점으로 각인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위스키 포럼은 관광 활성화 측면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크다. 생산 현장 견학과 시음, 지역 음식 체험, 학술행사, 수출 상담 등을 결합하면 산업과 관광을 아우르는 행사를 만들 수 있다. 해외 전문가와 구매자가 참여할 경우 지역 기업의 판로 확대와 도시 홍보 효과도 기대된다.
남양주시는 기원 주변을 미식거리로 조성하고 위스키와 연계한 축제를 개최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위스키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역 음식점과 농산물, 문화예술 콘텐츠를 함께 묶어 방문객이 머물며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미식거리 조성은 지역 상권과의 협력이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 지역 식재료를 활용한 음식과 위스키의 조합을 개발하고, 소규모 음식점과 청년 창업자 등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축제 역시 일회성 행사에 그치지 않고 지역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정착하려면 주민 참여와 안전관리, 교통 대책 등을 세밀하게 마련해야 한다.
주류를 중심으로 한 행사인 만큼 책임 있는 음주 문화를 확산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대중교통과 셔틀버스를 확대하고 음주운전을 예방하는 체계를 갖추는 한편, 미성년자 보호와 건전한 시음 기준을 명확히 해야 지속 가능한 축제로 성장할 수 있다.
지역 기업의 성장을 도시 발전과 연결하는 일은 지방자치단체의 중요한 과제다. 경쟁력 있는 기업을 유치하는 것만큼 기존 기업이 지역에 뿌리내리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기업이 고용과 투자, 관광객 유입을 늘리면 지역경제의 기반도 그만큼 두꺼워진다.
기원은 남양주의 자연환경을 제품 경쟁력으로 활용하고 지역주민 고용을 통해 상생을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 방문자센터와 위스키 포럼, 미식거리, 축제가 더해진다면 제조업과 서비스업, 관광업이 결합된 새로운 지역경제 모델을 만들 수 있다.
최 시장은 도 대표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싱글 몰트 위스키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 최고의 위스키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10년 전 수제맥주 공장에서 나눴던 기업인의 꿈이 현실이 된 만큼, 앞으로의 도전도 남양주시와 함께 추진하겠다는 의미다.
남양주시가 해야 할 역할도 분명하다. 기업의 시설 확충을 지원하는 동시에 지역 상권과 주민이 성장의 성과를 공유할 수 있도록 연결해야 한다. 도로와 주차장 등 기반시설을 점검하고 관광객 편의를 높이는 한편, 위스키 산업과 연계할 수 있는 음식·문화 콘텐츠를 발굴해야 한다.
특히 ‘남양주에서 생산한 한국 위스키’라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코틀랜드의 지역별 위스키와 프랑스의 와인처럼 생산지의 자연과 역사, 사람의 이야기가 제품에 담길 때 브랜드의 경쟁력도 높아질 수 있다.
화도읍에서 시작된 작은 증류소의 도전은 이제 세계 20여 개국을 향하고 있다. 맑은 물과 뚜렷한 일교차, 기업인의 집념이 빚어낸 위스키가 남양주의 새로운 이름이 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기원의 성장이 기업 한 곳의 성공을 넘어 지역 일자리와 골목상권, 관광산업을 함께 키우는 동력으로 이어지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다.
이코노미세계 / 김은주 기자 sweetmom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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